글/시

벌써 이십 년도 넘었는데 거울처럼 그는 나타나

Lim_ 2024. 12. 13. 21:06

벌써 이십 년도 넘었는데 거울처럼 그는 나타나


 그게 문병이었던가
 그냥 아버지 따라서
 철없는 꼬맹이 하나가 따라간
 그런 거지.

 내 최초의 기억부터
 할아버지는 언제나 큰댁의
 가장 따뜻한 안방에서
 두텁고 원색 자수를 넣은
 이불 밑에 누워있었다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언제나처럼
 온몸이 술기운으로 활활
 불타오를 때까지
 마시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오다
 그는 빙판에서 미끄러져 버렸고

 부러진 뼈를 수술하고
 마취에서 깨어난 후
 의식만 남고
 정신을
 영영
 잃었다.

 아버지의 말로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채혈을 받아야 할 때마다
 저 망할
 마녀 쌍것들이
 내 피를 가져다 판다고
 성치도 않은 몸으로 격렬한 광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지금
 납골당에 있는데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여하튼,
 큰댁에 갈 때마다
 그는 아버지의
 그러니까 막내아들의
 그리고 나의
 그러니까 손주의
 발소리를 듣고

 움직일 수도 없는 완전히 망가져버린 몸을 어거지로 일으켜 세워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을
 내게 보냈다

 어린 나는 그것이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도대체가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몇 번이나 그
 세상에서 전혀 볼 수도 없는 표정과 눈을 내게 비춘 뒤
 할아버지는 영원히
 표정을 잃었다.

 눈도.

 그리고한겨울이찾아와다시한번창동의어느어두운구석에서낡은패딩으로온몸을감싸고웅크린남자의보이지않는그얼굴을한참이나바라보고, 마침내
 알아차렸다,

 기억 속의 그 눈, 표정, 뒤틀린, 입가와, 주름이, 자글자글해, 왜곡된, 얼굴은,
 다시는 지상에서 찾을 수 없는
 가장 필사적이고
 정신조차 없는
 미소였다고.

 거울을
 닦아봐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