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우드 기록
웨스트우드 기록
웨스트우드의 유난히 숙박비가 싼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건물은 언덕을 깎아낸 듯한 평지에 심지어 도로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숨어있는 것 같은 건물이라,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당시 제가 비행기 티켓 값을 치루고 나니 최소한의 식비와 별로 의미가 없는 여윳돈밖에 없었는데도 그곳에서 두 달 가까이 지냈으니, 숙박비는 참 신기할 정도로 저렴했던 것입니다.
여행의 동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니, 애당초 여행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에게는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 대한 동경이랄지 처참한 갈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가면, 특히 외국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은 말입니다, 제가 낡은 츄리닝 차림으로 길거리를 멍하니 어슬렁거리고 있어도 그 지방의 사람들은, 아, 아시아인이 있군, 하고 더 이상의 관심을 끊어버립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이랄까, 누구에게나 조국에서는 단순히 길을 가다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한 판단이 서고 마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이나 눈동자 같은 것을 곁눈질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지, 불길한 인간인지 안전한 인간인지 알아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전부 무의식처럼 순식간에 머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아니라면 이런 건 전부 제 병약한 머릿속에 있는 피해망상이고 오히려 제가 그런 짓을 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서울에서 5~6년을 사는 동안 저는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부부와 마주칠 때마다, 매일 새벽 아내와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를 내는 창문 건너편의 남자로 추정되는 노인을 골목에서 볼 때마다, 심지어 5년 쯤 전에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전화를 해서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때, 모두가 모두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 어쩌면 저 자신도 스스로의 이름을 까먹는 곳. 그러한 장소에 대한 갈망은 분명히 ‘도망치고 싶다’는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돈이고 뭐고 어떻게든 수를 내서 도망쳤습니다. 분명히 관광은 아니었습니다. 두 달 내내 절대 웨스트우드로부터 멀리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요.
제 방은 2층 침대 3개를 놓아 여섯 명이서 쓰는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제가 알게 된 것은, 제가 가격만 보고선 멋모르고 선택한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그야말로 도주자들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침대 맞은편 왼쪽 침대의 1층을 쓰는 중년의 남자와 어쩌다보니 대화를 트게 됐습니다. 좀 대화를 해보니 그는 딸이 하나 있는 상황에서 부인과 이혼소송이 벌어졌는데, 부인의 변호사가 엄청난 실력을 발휘해 남자의 양육권부터 개인재산까지 전부 동결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까지 뺏긴 그는 어떻게든 긁어모은 소액의 돈으로 이 게스트하우스의 침대 하나를 빌리고, 아침마다 차를 타고 출근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넥타이를 가져올 여유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며 침대 기둥에 줄을 달아 새것인 것 같은 넥타이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 중년남자의 본래라면 전형적인 건강한 백인처럼 생겼었을 얼굴은, 얼핏 봐도 패배주의가 덩어리 채로 들러붙어있었고, 누가 살짝 밀기만 하면 온몸이 사금파리처럼 깨질 것만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그 남자와 친하게 지냈습니다만, 어쩐지 뭐라고 대화해도 기가 빠지는 기분이라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맞은편 오른쪽 침대의 1층은 안경을 쓰고 살집이 있는 백인남자였습니다. 저는 거기 지낼 때 물보다 오히려 맥주를 더 많이 마셨습니다만, 사온 맥주를 좀 나눠주니 금세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자연과학자라고 했습니다. 과학자 일을 할 때도 자연보호 운동에 관심이 있었다는 모양인데, 어쩌다보니 우선순위가 바뀌어 본업보다는 자연보호 운동에 더 힘을 썼다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러다보니 연구소에서는 제명되고, 자신도 차라리 이게 낫다 하며 환경운동에 몰입했던 모양입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으나 환경보호 운동에서 뭔가 엄청난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가장 원론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모순과 회의감을 느껴 더는 기력도 없고, 결국에는 남은 재산도 없게 되어 운동단체에서도 탈퇴한 채, 어느새 이 게스트하우스에 있게 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제 기억에 그는 로비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이 하루 종일 자기 침대에만 누워있었습니다. 가끔 씁쓸한 마음이 들어 규칙을 어기고 맥주 두 병을 방에 가지고 들어가서 그에게 한 병을 나눠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늘 고맙다고 하며 마셨는데, 마치 인생에 남은 일이 맥주를 마시는 것밖에 없다는 듯한 그의 침울한 표정 때문에 흥이 깨지곤 했습니다.
자주 얼굴을 보다보니 친해지게 된, 요리사가 직업인 흑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저는 그녀를 장난삼아 블랙마마(Blackmama)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 근처에서 공연하던 매직마마(Magicmama)라는, 풍채가 엄청난 흑인 여배우가 주연인 연극에서 따온 별명이었습니다. 웨스트우드에서 할리우드까지는 사실상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여서, 여기저기 매직마마의 포스터가 붙어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녀도 그 전 과학자가 하루 종일 침울해서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자기가 공용부엌에서 요리를 할 테니 룸메이트인 당신이 좀 데리고 와주지 않겠느냐, 하고 청했습니다. “불쌍한 아이(그녀는 나이가 꽤 있어 30줄인 사람들도 아이, 즉 Kid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우리가 뭔가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저는 늘 멍하게 있었습니다. 잠에서 깨면 주로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담배든 뭐든 피우러 잠깐 주차장에 나가고, 다시 들어와 앉는 것을 해가 질 때까지 반복했습니다. 음식은 3일에 한 번 쯤 먹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인가 블랙마마가 평소처럼 죽은 동태눈깔을 하고 앉아있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걸어서 5분이면 UCLA야. 거기 정원이 정말 아름답지. 네 소재가 될 지도 몰라.” 당시 저는 누군가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집요하게 캐묻는 것이 아니면 자신이 글쟁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기껏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 와서 또 신분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아는 건 블랙마마와 브라질 청년 파블리시오 밖에 없었습니다. 파블리시오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권하기에 햇살이 따스한 오후 2시쯤 UCLA로 갔습니다. 비척비척 캠퍼스 안을 둘러보다가 넓은 정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자연에 대한 미의식이 전혀 없는 걸까요. 분명 나무가 울창하고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있고, 도심 속의 멋진 녹음이었습니다만, 그뿐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무가 있다, 풀이 있다, 꽃이 있다. 다만 그뿐. 만약 기다린다면 무슨 기적적인 아름다움이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 10분 정도 멀거니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냥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담배가 거의 다 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방향을 틀어 마트로 갔습니다. 그 구역에서 담배를 파는 곳은 랄프스라는 대형마트밖에 없었는데, 거기가 아니면 해변 쪽으로 한참 가서 담배와 시가를 파는 작은 가게에 가야했습니다. 가끔씩 차라리 그곳으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담배야 어디서 사든 똑같지만, 랄프스에서는 담배를 구입하기 위한 절차가 너무 복잡했습니다. 담배가 전부 자물통이 걸린 진열장 안에 들어있고, 점원에게 담배를 구입하겠다고 하면 먼저 신분증이나 여권부터 제시해야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것이 확인이 되면 점원이 자물통을 열어서 담배를 꺼내고, 그걸 또 여권과 함께 무인판매대로 가져가 이상한 인증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돈을 지불하고 담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싸기는 또 얼마나 비싼지. 어째서 진보적인 주가 보수적인 주보다 담뱃값이 비싼지 여러 번 생각해봤습니다만, 별 수 없는 일이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고약한 농담 같은 과정을 거쳐 담배를 사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습니다. 현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을 지나쳐야하는데, 마침 한쪽 구석에서 파블리시오가 액상전자담배 같은 것을 피우며 햇볕을 받고 있었습니다. 구불구불한 장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그가 제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도무지 얼굴에 근심걱정 같은 것은 없고 아이 같이 웃는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의 침대는 그 이혼소송 중인 남자의 2층입니다. 방도 같은 방이고, 파블리시오는 도대체 뭘 하는 놈인지 이놈도 24시간 게스트하우스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작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불을 붙이며 그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봐, MJ, 이따가 역사박물관 갈래?”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뜬금없이 그가 물었습니다.
“이따가 언제? 어딘데 거긴?”
“한 30분 뒤에. 세르비아 형제 중 동생도 갈 거야. 우버 타고 20분이면 간대.”
“아침부터 맥주 마셨더니 좀 피곤한데.”
“그러지 말고, 잠이야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 자겠지만 박물관 가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막무가내로 맞는 소리를 하는 게 그입니다. 이쪽 의사는 신경 안 쓰고 억지로 권하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불쾌하지가 않습니다. 곧 박물관에 가리라는 사실이 어찌나 기쁜지 표정에 다 드러나는 이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불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너 손에 쥔 거 피웠지. 취한 채로 전시품 보는 게 의미가 있어?”
“오히려 더 좋아.” 이러면서 만면 가득히 웃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입니다. 파블리시오와 친구가 된 뒤로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 인류가 그가 피우는 걸 항시 피우게 된다면, 아마 문명이야 정지하겠지만, 이 세상에 전쟁이니 다툼이니 하는 것은 아예 없어지지 않을까.
아무튼 박물관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저도 아침에 깨서부터 UCLA에 갈 때까지 줄기차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던 차라 좀 취해있었습니다. 전시장 안에 웬 100년은 족히 됐을법한 퀼트 공예품들이 걸려있었고…… 사실 전시장보다는 박물관 외부의 조형물들이 차라리 기억에 남았습니다. 벤치들 사이에 금속으로 만든 죽은 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는 조형이 있었는데, 그걸 보니 왠지 서울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는 길이 있는데, 따라 가다보면 장미가 만발한 정원이 나왔습니다. 너무 시뻘게서 눈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세르비아 형제의 동생 쪽은(안타깝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형 쪽이 ‘넴’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건 기억합니다) 계속 저와 파블리시오, 풍경 등을 카메라로 찍고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 고생을 좀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우버 운전자가 꽤 오랫동안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웨스트우드에서의 마지막 날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이대로 미적거리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차라리 불법체류라도 해버릴까, 그러고 있던 차였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같이 어울렸던 미국인 친구네 집에서 조금 더 버티기로 했습니다. 인디애나로 가야했습니다. 국내선은 생각보다 저렴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이 되자 혼자 거리에 나왔습니다.
술을 마실 생각으로 나온 것입니다. 웨스트우드의 서쪽은 밤이 되어도 은근히 조명이 밝아서, 미국답지 않게 밤에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밤거리를 걸어 주점이 많은 블록을 돌아다니다가, 유난히 왁자지껄한 스포츠 바에 들어갔습니다.
기다란 바 뒤쪽 벽에 커다란 TV들이 붙어있고, 하나 같이 미식축구 중계. TV 볼륨이 크니 손님들도 술을 마시면서 큰 소리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온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게스트하우스의 누군가에게 함께 마시지 않겠냐고 권유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런 기분이 아니었고, 게다가 내일이면 떠날 텐데, 무슨 소용인가 싶어 혼자 온 것입니다. 만취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마지막 날 주점이나 들러볼까,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시끄럽건 말건 바테이블에 앉은 채로 보일러메이커 3잔인가 4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계산을 하고 밖에 나오자 바람이 미지근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서 잘까, 하는데 누군가 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새까맣고 관절이 울퉁불퉁한 마른 손이었습니다. 뭐야, 하면서 보자 아주 늙고 머리가 새하얀 흑인 노숙자였습니다. 이빨이 안 좋은 것인지 우물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조금의 자비를.” 조금의 자비를. 영어를 사용하다보면 가끔씩 놀라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따금 말도 안 될 정도로 노골적인, 번역해 놓으면 가슴을 후벼 파는 말들을 사용합니다. 마음에 혼란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티내지 않고 배낭과 봉투 따위를 바리바리 짊어 매고 있는 늙은 거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따뜻한 날인데도 왜인지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사 하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니요. 오래 굶었어요.” 캘리포니아에서 쓰는 악센트가 아니었습니다.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나요?”
“두 블록만 가면…….” 이때까지도 노인은 제가 뭘 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식당까지 안내해 달라고 했고, 노인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종의 멕시코 음식점 같았습니다.
“두 개 고르세요. 오늘 먹을 것과 내일 먹을 것. 포장해달라고 하세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러면서 노인은 카운터 직원에게 뭐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제가 계산을 했습니다.
음식이 나올 동안 저와 노인은 가게 구석의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조나단.”
“조나단,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선생님은?” 그 늙은 노숙자는 계속 저 같은 새파란 애송이를 Sir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영어 쓰는 사람들은 MJ라고 부릅니다.”
음식이 나왔습니다. 조나단은 그걸 받아서 두 개 다 배낭 안에 차곡차곡 넣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조나단은 연신 저에게 고맙다고 감사를 하며, 피부색과 대비되 더욱 하얗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습니다.
“저기, 조나단.” 저는 거의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걸었습니다.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말해놓고도 이 영어문장은 기괴한 구석이 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조나단은 계속 무어라고 감사인지 축복의 말인지를 반복하다가 깜깜한 거리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애당초 자세히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제 귀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술기운 때문에 약간 삐딱하게 서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곳은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이 아니게 됐구나.
아마 다시는 오지 않게 되겠지.
다음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했는지 안했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고, 저는 인디애나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