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생각

허술하게 입은 인간거죽이 오히려 인간이 되는 일에 방해가 된다

Lim_ 2020. 4. 10. 06:54

허술하게 입은 인간거죽이 오히려 인간이 되는 일에 방해가 된다


 딱히 당신을 갖고 싶다는 게 아니다. <내가 당신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오해하기 쉬운 문장이다. 세계의 조건에 대해 성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애당초 당신 자체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가장 큰 문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세계의 일부다. 나는 <타인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애정을 기반으로 행동하기도 하는> 인간이 나인 세계에서 살고 싶다.

 몇 달 전부터 누군가가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면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혐오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무슨 이상한 윤리관 때문은 더욱 아니다. 단순히 요즘 내가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나오는데, 타인의 섭식장면이 내가 음식을 먹을 때의 느낌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위장이 이상한 것 같다. 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병원은 가지 않겠다. 의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인이 괴로워하거나 사라지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다. 나카하라 츄야의 시처럼 “죽어도 괜찮아.”라고 말할 사람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사람이 더없이 소수이기에 찾기 힘든 것이겠지. 얘기가 샜는데, 아무튼 병원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접수대의 간호원에게 아무래도 소화기가 이상한 것 같으니 검사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 병원에 가기 위해 필요한 돈을 가족에게 꾸는 것이 싫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싫다. 내 육체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 싫다.

 주로 의자에 앉아,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표지를 보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대부분 오래 전에 두어 번은 읽은 책들이다. 특별히 좋았던 책은 여섯 번이나 읽기도 했다. 그러나 요새는 읽지 않는다. 그저 표지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꽂아놓을 뿐이다. 의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15살 때 처음 대표작을 읽게 되었고, 20대 초에는 거의 숭상하며 없는 돈을 모아 전집을 구비한 알베르 카뮈. 표지에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물고 있다. 고전적인 미남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살중독의 사소설가인 다자이 오사무. 만년의 표지에서 유카타를 입고 원고를 살피고 있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는 아르튀트 랭보의 시집. 흑백사진이지만 그 고운 얼굴에 광기가 서려있다. 등등……. 이들은 모두 내 방에 상주하는 유령들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 유령들이 나를 건축해놓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들을 가구처럼 여기게 되었고, 그들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밤새 유령들과 이야기하고 의논하던 시절엔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딱히 당신을 갖고 싶다는 게 아니다. 우선 당신이 누구일지조차 설정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일종의 보수용 시멘트처럼 생각하고 있다. 나는 결함투성이의 여기저기 부품이 빠진 인형인데, 빠진 부분에 당신을 부어넣고 굳히면 뭐든 간에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방금 조소했다. 당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한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당신과 만나면 내가 보다 인간다워질 수 있을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 오히려 더 큰 자기혐오라는 결과가 돌아올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의욕을 잃었다. 두려운 것도 초조한 것도 불안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의욕을 잃었다. 과거에 몇 번인가 어떤 당신의 손을 잡아본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운이 좋았는지 당신은 대체로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내가 항상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를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상한 인간이었던 것을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고백하는 것인데, 당신의 손을 잡은 채로 고독에 발광하던 때에, 나는 거의 본능처럼 당신이 내 고통을 덜어 주리라는 단 한 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 사랑스러웠던 당신이여,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철저히 타인이었다.
 그런 경험 뒤에는 이제 의욕이고 동기고 없는 것이다. 내 외로움은 스스로 뒤틀려 만들어낸 고통이고, 이렇다면 외로워할 이유도 목적도 없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질병이나 체질처럼 되었다.

 몇 년 전인가, 지하철에서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라, 분명 장애인이 쓰러졌었지. 기묘한 불안을 느꼈다. 잠시 후에, 불안을 느꼈다는 것을 안도할 수단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단락에서 삼십 분 정도 멈춰있었다. 무엇을 누구에게 서술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리고 스스로 정의하거나 비유한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조차 독안개처럼 흐릿하고 유해해서. 백 마디의 말이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쳤다. 확실한 것은 내가 나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부연설명 붙일 것도 없이, 증오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