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견자見者
거울과 견자見者
수천 번 원을 그려도 원은 그려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선을 그어도 선은 그어지지 아니한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나는 보이지 아니한다
플라톤은 너무 쉽게 말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욕설을
입안에서 잘근잘근 씹는다
수천 번 거울을 보아도 그곳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더러는 나
자신이 알 수 없으니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털끝이 거꾸로 선다. 하얀 벽지가 발려 병실의 소독약
냄새가 당장이라도 스며들 듯한 방에서
이미 형체가 불분명해져 망령처럼 되어버린 나의
하얀 손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수천 번 물어뜯어도
나의 손일 리가 없음이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은 한 줄의 선이다
그러나 그런 선이 존재할 도리가 없다
벼랑 끝에서 발밑을 조심하기는커녕 하늘이 천구天球라는 것에
어리둥절하여 머리 꼭대기를 수천 번 쳐다보는
아무리 영혼의 커튼을 걷어도 존재할 리가 없는 눈알이다.
물컹거리면서 딱딱한, 차갑지만 뜨거운 피를 흘리는
그러나 그 현실감 없는 윤곽에 나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몸뚱이 수천 번 난자해도 비명 지르는 건 내
가 아니라 수천 번 보았던 거울 속의 타인, 혹은 망령
아니면 수천 번 그려졌던 아무것도 아닌 것
직방형의 하얀 공간에서 내 물컹거리는 말초신경으로 우연히 발견한 물컹거리는 어떤 나비의 혹은 나방의 유충을 눌러서 죽이면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비현실적인 내장들과 체액 그것들은 비현실적이라는 단어조차 무용할만큼 비현실적이어서 동시에 그 체액이 묻은 내 물컹거리는 <손가락>이라는 이해될 수 없는 어떤 단말은 분명히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터진 애벌레와 구별되지 않고 그러한 일련의 광경들을 쳐다보는 나의 창窓도……, 그 창을 내다보는 누군가가 누군가인지를 알기위해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기에 수천 번 거울을 보았지만 거울은 사실을 보는 도구가 아니라 모호성을 더욱 확장시켜놓기만 하는 공포의 도구였다
수천 번 눈을 뜨자 나는 108개로 분산되어 마치 미지근한 설탕물을 타놓은 압생트처럼 희뿌옇게……
아아, 그렇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