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피, <아픈 피>의 작의
실질적으로 내 최초의 장막희곡이다.
<장막 희곡>
아픈 피
등장인물
한이삭
형호
용대
점원
젊은 여인
어린 아이
늙은이
목사
천사
프롤로그
캄캄하게 어둠이 깔린 무대
갑자기 머리 꼭대기에서 조명이 켜진다.
조명은 철제 의자에 불량한 자세로 앉은 한이삭을 비춘다.
한이삭: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뵙는군요. 나는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침묵) 이름이 뭐냐고요? 한이삭입니다. 한 이삭. 그 정도는 알고 계실 텐데 왜 묻는지 알 수가 없군요. 뭐 좋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별 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씀 계속 하시죠. (침묵) 그런데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아니지. 내가 왜 당신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허락받아야 합니까? (코웃음 치며 같잖다는 듯한 말투로) 나는 담배 피울 겁니다. 내 멋대로 피울 겁니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문다) 망할, 난 항상 내가 피우고 싶을 때 담배를 피워왔습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내뿜는다) 후우. 빌어먹을, 기분 같아서는 당신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싶군요. 아니 실제로 그러렵니다. 엿이나 드십시오. (관객들을 응시한 채 담배를 뻑뻑 피운다) 사실 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다만 나는 당신이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마주하고 보니 감회가 색다르군요. 아주…… 뭐라고 할까요? 환희에 가득 찬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킥킥 웃는다) 당신에게 그것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은 내가 내 신념에 따라 살아온 것은 인정해야합니다. 칭찬하라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내 자유의지가 이끄는 대로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뿜어낸다) 그래서, 내가 묻겠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뭡니까? 무슨 질문을 하시려고? (관객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경청한다) 뭐라고요! 우습지도 않군요! 하하! (얼굴은 관객들을 향한 채 몸을 굽히고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게 말이나 되는 질문입니까? 역시 이름값을 하시는군요.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왔냐고요? 내가 그걸 말할 수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평생 선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악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런 것들은 믿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의 종말뿐이었는데, 그 믿음마저도 당신 때문에 저버리게 됐군요. 당신이 정말로 원망스럽습니다. 원망? 아니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전부터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이것도 전부 현상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내가 강가를 걷다가 돌덩이를 하나 발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내가 그 돌덩이가 딱딱하다는 이유 때문에 돌덩이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것이 사실입니다. 돌덩이는 딱딱합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소한 나는 당신을 대면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후회 따위는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자조적으로 웃는다) 내 출생만 봐도 그렇습니다. 알고 계실 테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습니다. 부모의 얼굴 같은 것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힘들었겠다고요? 아니요! 나는 지금까지 부모 밑에서 자란 수많은 아이들을 보아오면서, 내가 고아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나는 강제로 집어삼켜야할 전통의 상속자가 되는 비극은 겪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당신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권태에서 태어난 광기어린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랑하게 말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고된 일입니다만,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몸을 굽혀 무대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끈다) 그렇다고 내가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지는 않겠습니다. 난 그렇게 고상한 인간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나와 그들이 닮기는 했지요. 그저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것뿐 만이라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뿌리부터 새로 짜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흠, 뭐 여하간, 얘기를 계속하죠. 내 행적에 대해서 물었었지요? 좋아요. 말씀드리겠습니다. 별로 재미있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가 어제 겪은 일들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한이삭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뒤 연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조명이 꺼진다.
막.
1막
세련된 카페가 배경으로 깔린다.
무대 중앙에는 둥근 테이블과 의자 세 개가 놓여있고 그 중 두 석을 용대와 형호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그들 앞에는 커피가 한 잔씩 놓여있다.
형호: 나는 자네가 이삭이를 불렀다고 해서 여기에 왔는데, 그는 아직도 보이지를 않는군. 정말로 다섯 시까지 이 카페로 온다고 했었나?
용대: 틀림없어. 내가 오늘 아침에 전화로 확인했네. 아마도 조금 늦는 모양이지!
형호: (커피 잔을 집어 들며) 하긴 그가 그렇게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인물은 아니었지. 일부러 약속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용대: 그런데도 자네는 그 친구와 어울리는 걸 좋아했지. 나는 그 점을 잘 이해할 수가 없네. 내 주변에서 이삭이를 좋아한 것은 오직 자네뿐이었거든.
형호: 이삭이는 특별한 친구였어! 그의 눈은 늘 남들과 다른 하늘을 보고 있었고, 그의 발걸음은 달에 사는 이처럼 허공을 딛었네. 그것만으로도 한이삭이라는 인간과 가깝게 지내야할 이유는 충분했어.
용대: 그건 칭찬인가? 나는 잘 모르겠군.
형호: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네.
용대: 하지만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오 년 동안 이삭이 그 친구는 자네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형호: 그것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일세.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왜냐하면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고, 내가 그러한 이삭에게 매력을 느낀 것이었으니까.
용대: 너무 일방적인 관계로군! 나는 이삭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이삭을 찬양하는 이유는 모르겠네.
형호: 찬양이랄 것 까지도 없어. 나는 언제나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이들에게 경외심을 느껴왔다네. 그것이 내 취향이지.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조금 뒤에 한이삭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들어온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고 지친 얼굴에 산발한 머리칼을 하고 있다.
한이삭: (지친 목소리로 혼자서 극적으로 중얼거린다) 아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구나!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권리 따위에 구애 받지 않고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연기를 뿜으면서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의식을 가진 자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최악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벌써 저녁이 다가온다! 창밖을 보라. 태양빛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두려워서…… 내가 미리 술을 마셔둔 것이지. (두리번거리며) 그런데 이 친구들은 어디에 있담?
한이삭이 느리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무대를 한 바퀴 빙 돈다.
그때 용대가 이삭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용대: (큰 소리로) 이봐! 이삭이, 여길세!
한이삭: (담배를 쥔 손으로 손가락질하며) 아하! 바로 저기에 있었군.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은 도무지 발견하기가 쉽질 않단 말이야. 아마도 그들이 세상과 너무도 비슷한 색깔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테지.
한이삭이 용대와 형호의 테이블로 다가간다.
형호: (일어서며) 이 친구야! 이게 얼마만인가!
한이삭: (팔을 벌리며) 형호! 내 친구! 자네를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자네는 변한 것이 없군. 여전히 백짓장처럼 하얗게 깨끗하군. 자네 혹시 지금 연인이 있는가?
형호: 지금은 없다네. 그건 왜 묻지?
한이삭: 그럴 줄 알았지! 남자는 누구나 여자가 생기면 타락하기 마련이라네. 그러나 자네의 눈이 옛날처럼 맑고 평이하기에 여자가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아챘지. (용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고 용대! 자네와는 가끔 연락을 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군.
형호: 가끔 연락을 했었다고! 그렇다면 왜 나에게는 연락을 주지 않은 건가?
한이삭: (형호를 향해) 자네는 늘 내게 잘 해줬지. 나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공포를 느낀다네. 왜냐하면 그들의 친절함을 볼 때 언제나 나는 배신의 가능성 또한 보고 불안에 떨기 때문이지. 내가 자네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의 유대를 위해서였다네!
용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그렇다면 나와 연락을 계속한 것은 무엇 때문이지?
한이삭: (명랑하게) 자네는 날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보다 내가 자리에 앉아도 되겠는가?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형호도 자리에 앉는다.
한이삭은 한동안 침묵하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피운다.
용대: (얼굴을 찌푸리며) 잠깐, 어디서 술 냄새가 나는데.
한이삭: 아! 그건 나한테서 나는 냄새라네. (손목시계를 보며) 내가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지? 그게 바로 술을 좀 마시고 오느라고 늦은 거라네.
형호: 술을 마셨다고? 혼자서 마셨나?
한이삭: 그래!
형호: 어째서 그랬지? 술을 마시고 싶었다면 우리와 함께 마시면 되지 않나?
한이삭: (고개를 흔들며) 아니야. 난 자네들과 만나기 위해서 술을 마신 거라네. 왜냐하면 맨 정신으로 자네들을 만나기에는 나는 너무 겁이 많기 때문이지. 인간을 대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 섬세하고 위태로운 작업이라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 작업을 하기 전에 알코올을 몇 병 뇌수에 때려박곤 하지.
용대: (혼잣말로) 오 년 전보다 더 망가졌군. 마치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어리처럼 타락한 거야.
형호: 내가 자네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오 년 만에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한이삭: 잠깐만. (담배를 쥔 손을 번쩍 들며) 웨이터!
점원이 들어온다.
한이삭: (용대를 바라보며) 여긴 맥주 밖에 없지? (점원에게) 병맥주 하나 주시오!
점원: 알겠습니다. 그런데 손님, 죄송합니다만 저희 점포는 금연입니다.
한이삭: 금연? 금연이라니? 여긴 카페 아닙니까?
점원: 모르시는군요 손님. 최근에는 금연이 기본인 카페들이 대부분이랍니다.
한이삭은 점원을 응시하면서 담배를 입에 문다.
점원의 낯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역력하다.
한이삭: 여기서 담배를 끄지 않겠다고 버티면 나만 경우를 모르는 인간이 되는 거겠지?
점원: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손님.
한이삭: 하지만 웨이터, 보시오. 나는 평생 카페에서 담배를 꺼본 적이 없다오. 게다가 사람들이 커피랑 맥주 마시는 곳에서 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기야 요새는 어디를 가든 흡연자는 죄인이오. 이렇게 국가 수준에서 흡연자를 억압할 바에는 차라리 마리화나처럼 담배도 금지를 시켜버리든가 말이지.
용대: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지.
형호: 그래, 담배는 나가서 피우면 되지 않는가? 가게 사람 곤란하게 하지 말고 일단 끄게.
한이삭: (신경질적으로)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런데 내가 무식한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은 못 끄겠어. (벌떡 일어난다) 내가 웨이터께 하나만 부탁하지.
점원: 무얼 말씀이십니까 손님?
한이삭: (비장하게) 나를 한 대 치시오.
점원: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손님?
형호: 그래, 자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한이삭: 금연 장소에서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는 나를 한 대 치란 말이오. 그러면 내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끄겠소이다.
용대: (혼잣말로) 타락한 것뿐만이 아니야! 완전히 미쳤어! 나는 이삭이 이 친구를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 미치광이라고!
점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손님.
한이삭: 곤란? 곤란이라고? (흥분해서) 당장 내 턱주가리를 날려버리지 않으면 더 곤란한게 뭔지 보게 될 거요! 테이블은 엎어지고 다른 손님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리고 경찰까지 부르게 될 걸! 하지만 내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오! 카페는 평소처럼 조용해질 것이고 나는 순순히 담배를 끄겠지.
점원: (당황한 낯으로) 손님!
형호: 자네 왜 이러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야!
용대: (혼잣말로) 아니야, 이삭이는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으로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미쳤다는 증거지.
한이삭: 당장! 당장 내 얼굴을 치라니까! 내가 얻어맞고 바닥에서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구를 수 있게 하시오! 안 그러면 나는 더 큰 소동을 일으켜서 당신 사장까지 곤란하게 만들 거요. (피우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버리며 담배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보시오, 나는 또 담배를 피울 거요. 당신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않으면 말이지!
모든 인물들은 침묵하고 점원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십 초 가량을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다가 있는 힘껏 한이삭의 턱에 주먹을 날린다. 한이삭은 얻어맞고 넘어지며 바닥에서 구른다. 불도 안 붙인 담배 개비가 바닥에 떨어진다.
한이삭: (바닥에 넘어진 채 유쾌하게) 하하! 이거 좋은데! 당신 주먹이 꽤 맵군! 아아! 제기랄! 피는 안 났나? (얼굴을 짚어본다) 피는 안 났군. 아무튼 당신은 참 친절한 사람이오!
점원: 정말로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한이삭: 괜찮아! 괜찮고말고! (점원의 손을 잡고 비척비척 일어서며) 당신이 내 무리한 요구를 들어줬으니 나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줘야겠소.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갑을 꺼낸다) 만 원, 이만 원, 삼만 원…… 이거 받으시오. 내가 지금 풍족하지 못해 더 많은 돈을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오.
점원: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손님.
한이삭: 받으시오! 당신은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하는 거요. 그리고 지금 내 얼굴을 친 그 주먹의 감촉을 잘 기억하시오. 현대 사회에서는 어지간해선 느끼기 힘든 감촉일 테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 가슴 속의 야생성을 언제나 지각하고 있어야 하오!
형호: (안절부절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네 정말 괜찮은가? 왜 이런 일을 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용대: (혼잣말로) 완전히 돌았어.
점원: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겠습니다. (돈을 받는다) 그러나 손님을 때린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군요.
한이삭: 당신에게 불유쾌한 경험을 하게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소중한 경험이오. 오늘 일은 잊어버리되 그 감촉은 잊어버리지 마시오. 좋아!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럽군.
점원: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미처 여쭙지 못한 것인데, 맥주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한이삭: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프리로 주시오.
점원: 알겠습니다.
점원이 무대에서 퇴장한다.
한이삭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 개비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담배갑에 도로 넣는다. 그리고 어지러운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 앉는다.
형호: 자네랑 있으면 정말이지 평생 못 볼 꼴을 다 보게 되는군! 턱은 괜찮은가?
한이삭: 괜찮아! 내가 꽤 맞아봐서 알지. 골이 울려서 약간 어지러운 정도야.
용대: 자네는 오 년 전보다 배는 미쳤군.
한이삭: (명랑하게) 그런가? 그거 참 고마운 소리로군. 미친다는 것은 좋은 거야. 왜냐하면 미친 사람은 미치지 않은 사람보다 항상 더 논리적이거든.
형호: 논리적이라고?
한이삭: 그래! 미친 사람들은 정상인들이 쉽게 타협해버리는 문제들과 절대 타협하지 않고 절대의 논리를 한계까지 밀고 나가지. 그들은 어떤 고명한 철학자보다도 더 진실에 근접하는 거야. 왜냐하면 진실이란 언제나 비인간적인 것이거든!
용대: 자네는 광기를 미화시키고 있어.
한이삭: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칭 사회와 모럴의 인간들이 늘 중요한 문제들을 못 본 척하고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사실일세. 그들의 일상과 안위를 위해서 말이야. 진실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안정을 산산조각내버리지. 진실에 근접하는 대가로 미치광이는 자신의 정신이 휴식할 수 있는 여지를 모조리 내줘버려야하는 거라네.
형호: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진실의 인간이 되려고 하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한이삭: (한숨을 내쉬며) 그것은 정당한 의문일세.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본성 때문에 혹은 사상 때문에 일생의 안락을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리기도 하지. 옛날에 어느 부유한 백인은 인간사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개인의 거대한 결심을 실험해보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노상강도를 저지르기도 했지.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사회적 안위마저 송두리째 던져버리면서까지 진실의 귀퉁이라도 맛보고 싶어하는 거라네.
용대: (흥분하여) 그건 정신병자들의 욕망이야!
한이삭: (웃으면서) 그래, 정신의 병이지!
점원이 들어온다.
그는 쟁반에 병맥주 하나를 받쳐들고 들어온다.
점원: 맥주 나왔습니다.
한이삭: 아! 고맙습니다. (맥주를 받아 들고 마개를 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병증이라는 것은 일반과 다를 때에 그런 명칭이 붙여지지. <우리>들의 병증은 바로 진실이 없는 행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일세. 그러나 진실에는 인간의 행복이 손톱만큼도 없지. 그래서 우리는 진실의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라네.
형호: 그렇다면 자네도 그렇단 말인가?
점원이 퇴장한다.
한이삭: 나? 글쎄, 나는 그들과 같을 정도로 예술가다운 집착은 갖추지 못했다네. 다만 내 가슴 속에는 항상 어떤 치명적인 불만족이 자리하고 있지. 그것이 나를 타락과 퇴폐의 길로 내몰지. 그것이야말로 나의 반항행위의 증거라네.
용대: (퉁명스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제 됐네. 그보다 자네는 아직 그간 자네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한이삭: 아! 그렇군. 형호가 내게 물었었지. 어떻게 지냈냐고 말이야. 나는 그간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해봤다네. 가장 최근의 일에 대해 말해볼까? 나는 얼마전에 술에 취해서, 갑자기 나의 야생적 본능을 시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동네 구석진 곳에 있는 사창가로 갔지. 만 원권 지폐 몇 장을 손에 달랑달랑 들고 말이야.
형호: 부적절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군!
한이삭: 그래, 바로 그게 중요한 거야. 나는 랭보처럼 생각하기로 했다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가 감각으로 더듬을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가져봐야겠다고 말야. 아무튼 나는 사창가로 가서 아무 여자나 한 명을 골랐지. 그리고 좁고 지저분한 방에서 그짓을 시작했어. 그러나……
용대: 그러나?
한이삭: 내게는 동물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어. 닳고닳은 여인을 보고도 멋대로 발기하는 내 페니스를 이용해 그짓을 하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회한과 슬픔 뿐이었다네. 내가 쾌락조차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생명력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말이야. 나는 단백질로 만들어진 통나무에 내 페니스를 삽입하는 느낌이었다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슬퍼하면서 일을 치뤘고, 이미 내 손을 떠난 종이다발을 내던지고 우울과 몽상에 잠겨 가게를 나왔다네.
형호: 내가 보기에 자네는 건강한 욕망을 가질 필요가 있어.
한이삭: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것은 옳은 말일세. 도대체 언제였던가? 내가 마지막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러나 나는 인간적인 것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다네. 나는 옛날부터 내가 조르바 같은 인간이 되기를 정말로 바라왔다네. 그러나 나는…… 아니야. 나의 본능은 너무나도 관념과 의식에 잠식당해버렸어.
한이삭은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발작적으로 웃는다.
형호와 용대는 이상한 눈빛으로 한이삭을 바라본다.
한이삭: (유쾌하게) 아니야! 비극이라고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어! 나는 유쾌하네. 나는 단 한 사람의 인간이고, 내 의식과 끝 모를 자유가 너무나도 유쾌하다네.
용대: 자유! 자유라고! 자네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한이삭: 당연하지. 스스로 자유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모두 자유야. 다만 자유를 자각하게 되면 더 이상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아둬야하네. 이십사 시간 내내 아우성치는 피, 안식 없는 광기, 무한하고자 하는 갈망. 이런 것들이 모두 자유의 대가지.
용대: (중얼거리며) 그것 또한 미친 자의 의식이야.
형호: 그렇다면 자유를 찾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한이삭: 무엇이든지! 신이 될 수도 있고 운명이 될 수도 있지. 그리고 역병이 될 수도 있으며 천재지변이 될 수도 있다네. 자유란 논리의 끝에 있는 비논리, 동의할 수 없는 모든 것이야.
한이삭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맥주를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이삭: 미안하지만 난 잠깐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와야겠네.
용대: 자네 완전히 골초로군.
한이삭: 아! 누군가도 말했듯이 니코틴은 정신을 맑게 해주거든.
한이삭이 퇴장한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용대: (커피잔을 집어들며) 어떤가?
형호: 어떠냐니?
용대: 이삭이 말야. 여전히 자네가 알던 그 이삭이인가?
형호: (침묵) 변하지 않았어. 많이 변하지는 않았어. 다만 더 날카롭게 날이 서있어. 오 년 전의 그때보다도 더. 날이 섰다는 표현은 조금 어감이 안 맞을 수도 있겠군. 그간 술과 담배로 육신이 무뎌진 것 같지만, 그의 정신은 더 높은 허공을 방랑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유쾌한 어조는 변하지 않았더군. 그렇지?
용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여전히 무대 위의 광대 같아.
형호: 나는 이삭이의 저 명랑한 어조마저도 편집증적인 철학적 신념의 발로라고 생각하네. 집착…… 그래, 어떤 집착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뿐더러 발견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그에게는 있어. 그것이 이삭이를 우리와는 다른 인종으로 만드는 것 같아.
용대: 다른 인종이라고? 그것은 굉장하군.
형호: 그렇다네. 말하자면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문명인도 야만인도 아닌, 초월적인 짐승 말이야…… 더 쉽게 말하자면……
용대: (내뱉듯이) 미치광이지!
형호: (웃으며) 하하! 그래, 그게 가장 쉬운 말이겠군. 그래서 나는 걱정이 돼.
용대: 걱정이 될 만도 하지. 그는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타락과 퇴폐의 길을 가고 있어. 설령 그 길이 의식적으로는 명증해지는 길일지도 모르지만, 그 끝은 어떨 것 같나?
형호: (진지하게) 그 역시 인간이라면 파멸하고 말거야.
용대: (무덤덤하게) 물론이지.
침묵.
둘은 커피를 마신다.
형호: 그에게 가족이 없는 것은 알고 있나?
용대: 알지. 그는 학생 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사실을 밝히고 다니지 않았던가?
형호: 그랬지. 그가 고아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당황하여 머뭇거리면 이삭이는 오히려 그것이 농담거리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이 웃곤 했지.
용대: 하지만 그에게는 잘 어울려.
형호: 그래. 나도 이삭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네. 물론 어딘가에 알지 못하는 혈육관계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는 마치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난 인간 같아.
용대: 시장바닥을 헤매는 광인처럼.
형호: 맞아. 시장바닥을 헤매는 광인처럼. (침묵) 말하자면 그는 돌아갈 항구가 없는 배인 셈이야. 악마처럼 검푸른 대양 위를, 낡아 빠져서 침몰하게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항해하는.
용대: 그 항해의 목적지는 어딘데?
형호: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
용대: (꿈꾸듯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한이삭이 절뚝거리며 등장한다.
형호: (일어서며) 자네 왜 그러나?
한이삭: (손을 내저으며) 아, 계단에서 굴렀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야.
형호가 다가가 부축한다. 용대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는다.
형호: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다치다니!
한이삭: 별 거 아니야. 다만 걱정되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내 육신이 너무 딱딱해져버렸다는 것이지. 마치 바싹 마른 빵조각처럼, 충격을 가하면 그대로 부스러져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형호: (한이삭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 말대로네. 자네 많이 말랐군.
용대: (혼잣말로) 광증에 붙들리면 누구나 마르기 마련이지.
한이삭: 밥을 잘 안 먹어서 그래. 혼자 살다보니 자꾸만 식사하는 것을 까먹거든.
한이삭이 형호에게 부축받으며 의자에 앉는다. 형호도 자기 자리로 가서 앉는다.
한이삭: (눈을 감고) 알코올과 니코틴. 전부 독이지. 내 영혼을 갉아먹고 눈을 가리는 독. 하지만 나는 좋아. 왜냐하면 영혼 따위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조물주에게 되돌려준지 오래거든. 그리고 눈이 없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지. 아직 나에게는 까맣게 썩은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이 있으니까. 인간은 그 펄떡이는 고동만 있으면 돼. (눈을 번쩍 뜨며) 그런데 자네들 병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나?
형호: 병? 감기나 암 같은 것 말인가?
한이삭: 그래!
용대: (덤덤하게) 우리 외조모께서 얼마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지.
한이삭: 그렇다면 자네의 외조모께서는 잘 아시겠군. 병이란 말이야, 생명의 반증이야! 가슴에 못이 박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지. 나는 그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에 대해서 말씀이야, 예수에게 아직 남아있는 생명을 절감시켜주기 위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해. 우리는 풍족한 것에 대해서는 감각하지 못해. 가난할 때 가장 많이 느끼는 법이지. (맥주를 들어 마신다)
형호: 그런데 그 병이 왜?
한이삭: 나는 말이야, 언제나 병에 걸린 상태라네. (웃으며) 정신과 육신 모두!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고, 또 갖고 싶은 것을 미친 듯이 갈망한다네.
형호: 갖고 싶은 것이 뭔데?
한이삭: (읊조리듯) 내가 결코 갖지 못할 것.
용대: (혼잣말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곳.
침묵.
점원이 등장하더니 무대를 가로질러 퇴장한다.
갑자기 한이삭이 생기가 가득한 눈으로 형호와 용대를 두리번거리며 쳐다본다.
한이삭: (빈 맥주병을 한 손으로 흔들며) 다 마셨나?
형호: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아직. 왜, 갈까?
한이삭: 아니야. 여기 나서면 저녁 먹으러 갈 거지?
용대: 그래.
한이삭: 그렇다면 천천히 마셔. 나는 아직 할 얘기가 잔뜩 있거든.
형호: 그래, 그러고보니 아까 만난 뒤로 자네의 기행 때문에 정신만 산란했지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눈 것 같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나 해봐.
한이삭: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 좋아. 그런데 말이야, 나는 과거라는 것을 잘 분리시켜서 기억해내지를 못해. 십 년 전의 일이나 일 분 전의 일이나 똑같은 과거로 생각되서 나눠서 볼 수가 없다는 말씀이야. 내게는 오직 진흙덩어리처럼 뭉쳐진 과거와 지금 현재, 그리고 흐린 초점 너머로 광란하며 날뛰는 미래 밖에 없어. 내게 삼 일 전의 일이나 십오 년 전의 일 같은 구분은 불가능해. 그래서 나는 오로지 인상으로만 과거를 구분하지. 내게는 사실 자네들과 보냈던 학생 시절이 어떤 시대였는지도 알 수가 없어. 나는 그 시절에…… 내가 당시 만나던 사람들에게 받은 인상만을 기억하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할 내 얘기는 시대적으로 완전히 앞뒤가 안 맞을 수가 있어.
용대: (퉁명스럽게) 알았으니까 얘기나 해봐.
한이삭: 좋았어. 그러지. 나는 얼마 전에 말이야, 한 청년을 만났네. 그때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왼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옆에는 방금 내가 술 먹고 토한 토사물이 펼쳐져있고 말이야. 나는 태양 아래 앉아서 몽상에 잠겨있었지. 예를 들자면 나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부터 시작하여…… 여하간, 그러고 있었는데 어느새엔가 키가 크고 깡마른 청년 하나가 내 옆에 와서 앉더군. 하고 많은 벤치 중에 하필 내 옆자리에 말이야. 아마도 그도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지. 말하자면 자신과 닮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 말이야. (웃음 짓는다) 나는 술에 취한 눈으로 찬찬히 그를 살폈지. 그리고 나는…… 일종의 환희에 질렸어!
형호: 환희에 질렸다고?
한이삭: 그래! 나는 그 청년의 모습에서 지상에 격리당한 신(神) 같은 것을 발견했어. 그의 눈동자는 불안과 의심으로 떨리고 있었고 날카롭게 선을 그리고 있는 골격들은 가죽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지.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불만족의 신음들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 그것은 말이야, 그것은 젊음이었어! 영원할 것 같은 젊음!
용대: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젊음이라.
한이삭: 그리고 그의 눈은 느릿느릿 나와 마주하기 시작했지. 그 눈동자는 불이 붙은 다이아몬드 같았어. 나는 그 눈을 보고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지.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일생동안 얽매여왔던 반항의 표시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러자 그 청년이 마침내 입을 열었어. 공포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순식간에 내뱉듯이! 그는 이렇게 말했네.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용대: (혼잣말로) 이상한 녀석이로군.
한이삭: 나는 대답했지. <나는 네 친구다.>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어. <하지만 나는 내가 혼자인줄 알았는데요!> 나는 그에게 웃어보였지. <어떤 사람들은 너의 친구야. 그들 중 대다수가 이미 죽기는 했지만.> 그제서야 그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어. <그렇다면 납득이 가네요.>
형호: (용대에게) 이해가 가나?
용대: (무덤덤하게) 미친 놈들의 대화야.
한이삭: (크게 웃으며) 아무튼 간에 말이야, 청년은 이렇게 말했어. <그렇다면 아저씨에게는 내 의문들을 말해도 될까요?> 나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지.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말했지. <너는 왜 새가 나비를 잡아먹는 지가 궁금한 거지? 왜 태양이 떨어지지 않는 지도? 그리고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를 드려야 좋은 지를?> 내 말에 그는 감격한 것 같았어. 그리고 곧바로 내게 물어왔지. <아저씨는 그 답을 아시나요?> 나는 진중한 태도로 말했지.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알게 된 것들을 너에게 말해줄 수는 있지. 하지만 너도 네 얘기를 들려줘야 해.> 그러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어. <좋아요.>
형호: 얘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군.
한이삭: (테이블을 두드리며) 아, 하지만 그 전에. (고개를 돌리며 큰 소리로) 웨이터!
점원이 등장한다.
점원: 부르셨습니까?
한이삭: (점원을 응시하며) 내가 맥주를 시키는 게 좋겠소 아니면 커피를 시키는 게 좋겠소?
점원: (고민하더니) 이미 취하신 것 같으니 커피를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이삭: 그렇다면 커피를 주시오. 하지만 브랜디를 타서! 가능한가?
점원: 사실 저희 가게에는 브랜디가 없습니다 손님. 하지만 손님을 위해서라면 옆 건물에 있는 바에서 조금 얻어올 수도 있겠군요.
한이삭: 아! 하지만 그건 너무 미안한데.
점원: 신경쓰지 마십시오 손님. 저는 이미 손님에게 제 일당의 반 이상을 팁으로 받았습니다.
한이삭: 그렇다면 부탁하겠소.
점원: (공손하게) 알겠습니다.
점원이 퇴장한다.
용대: (비실비실 웃으면서) 완전히 자네 전용 웨이터가 됐군.
한이삭: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뭐얼, 다 내가 사람이 좋으니까 그런 거지.
형호: (혼잣말로) 확실히 그에게는 기이한 매력이 있어. 마치 어린아이가 자꾸 만화경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처럼, 주변의 인간들은 한이삭이라는 괴이한 인간을 관찰하거나 그와 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지. 생전 처음보는 이국의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잘 대해주려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정말로 우리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한이삭: (갑작스럽게) 그러고보니 아까 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만났어.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밖에 안되는 새끼 고양이었지. 술에 절어서 덜덜 떨리는 내 손으로도 쉬이 목을 꺾어 죽일 수 있을 그런 약하디 약한 생명체였어.
용대: 고양이?
한이삭: 그래, 고양이. 하얀 털에 검은 얼룩 무늬가 있는……. 나는 술 때문에 취기가 올라 조금 멍한 상태로 서있다가 그 고양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 그것은 가게 앞에 줄로 묶여있었어. 그리고 사람 손에 익숙한 듯 내 손을 피하지도 않았지. 그 작은 생물이 말이야…….
형호: 자네가 동물을 좋아했던가?
한이삭: 글쎄?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사람보다는 대하기 편하지. 개나 고양이나……. 여하간 내가 그것을 쓰다듬는데 그것은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가만히 있었어. 나는 멍청한 얼굴로 계속 그것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지. 이놈은 내가 누군줄 알고 내 손에 몸을 맡기는 것일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것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는데……. 게다가 그놈은 심지어 몸을 뒤집더니 그 작은 손과 입으로 내 손가락을 물면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어.
형호: 붙임성이 좋군. 나도 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는데, 동물들은 그렇게 아프지 않게 서로 짐짓 물고 하는 것이 놀이라나봐.
한이삭: 그래, 그렇다더군. 나는, 흠, 한 삼 분 정도 그것을 쓰다듬다가 일어났어.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지.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어. 나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동물들을 만날 때마다 늘 이상한 기분이 들어.
용대: (눈을 내리깔며) 그럴 수도 있지.
한이삭이 목을 가누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휘적휘적 젓는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입을 연다.
한이삭: 아무튼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그 청년은 말이야, 대뜸 거창한 화두를 꺼냈어. 그는 이렇게 말했지. <아저씨,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나요?>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 뿌리 깊은 몰이해가 그의 얼굴가죽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네. 나는 되물었네. <어떤 사람들 말이야? 너와는 다른 사람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어. <그들은 은총과 기쁨을 위해 산다.> 그리고 나는 간을 좀 재다가 말했지. <그러나 너는 그런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지?> <맞아요!> 그는 초췌한 눈빛으로 말했어.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할 지조차 몰라요. 내가 열렬히 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요! 아저씨는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우리는 말이야.> 내가 말했네. <태어날 때에는 그들과 같았어. 은총과 기쁨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는 갓 만들어진 순박한 어린아이들이었지.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지혜의 과실을 너무 많이 먹어버렸어. 얘야, 너는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니?>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지. <못하겠어요. 나는 도무지 그가……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영생이나 천국이 아니예요!>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네! 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이여! 위대한 독신자(瀆神者)여! 우리는 그야말로 형제나 다름없었다네. 하지만 나는 그가 나보다 젊고 생명력에 넘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지.
용대: (따분하다는 듯이) 신학이라.
한이삭: 나는 흥분해서 말했네. <내가 택한 것은 타락과 자기파괴의 길이야. 하지만 너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어. 너는 네가 이 땅에서 받게 된 모든 지옥 같은 고민들을 표현해야해!> 청년은 되물어왔네. <누구에게요? 누구를 위해서요 아저씨?>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너를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너의 친구들을 위해서!> 그는 내 말에 감명을 받은 것 같았네. 우리는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지. 침묵을 깬 건 나였다네. <우리는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들어갈 사람들이야. 왜 그런지 알고 있니?> 청년은 갑자기 눈을 빛내면서 대답했어. <우리가 바라는 영광은 천국에는 없기 때문이죠.> 그래, 그는 정답을 말했네. 나는 감탄하여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네. 그리고 메모지를 한 장 꺼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 청년에게 건넸지. <이게 내 연락처다.> 그는 그것을 받았어. <네 가슴 속에서 어떤 말(言)들이 부풀어오른다면 내게 전화해도 좋아. 이름도 모를 친구.> 그러자 청년은 자기 이름을 말하려고 했어. <내 이름은……> 하지만 내가 말허리를 잘랐지. <아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 고아야. 장자 상속권을 헐값에 팔아버린 아들들이지. 나는 간다. 집에 가서 좀 자야겠어.> 그리고 나는 성큼성큼 공원을 걸어나왔네.
형호: 그래서 지금도 그 청년의 이름을 모르는 건가?
한이삭: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래.
점원이 커피잔을 컵받침에 받쳐들고 등장한다.
점원: (한이삭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한이삭: 아, 고마워요.
점원 퇴장한다.
한이삭: (커피를 마시며) 이 얘기만 하고 일어나지. 그리고 며칠 뒤엔가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새벽 다섯 시 쯤이었을 거야. 나는 잠든지 두 시간도 안 된 참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비몽사몽해서 전화를 받았지.
형호: 평소에도 그렇게 늦게 자는가?
한이삭: 그래. 새벽은 귀중한 시간이니까. 새벽이 되면 공기 중에 광기가 수증기처럼 흘러다니지. 그런 시간을 자느라 놓친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야.
용대: 새벽 공기를 즐기는 건 팔자 좋은 백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우리는 낮에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 시간엔 잠을 자야해.
한이삭: (슬픈 표정으로) 비극적이군! 도대체 누가 자네를 사들인 건가?
용대: (반웃음을 지으며) 글쎄.
형호: 아무튼 그래서, 전화가 왔는데?
한이삭: 그렇지, 전화가 와서 나는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았어. 나는 수화기 저편에서 전화를 건 사람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대뜸 이런 질문이 날아왔어. <우리는 특별합니까?> 그 목소리는 밤에 취한 목소리였어. 몹시 흥분해있었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비 시체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잠기운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래.>라고 대답해버렸어.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그가 더욱 흥분해서 지껄였지. <그렇다면 특별하지 않은 그들은, 은총과 기쁨을 위해 사는 그들은 그른 것입니까? 옳은 것은 누구입니까? 인간의 소임은 무엇입니까? 영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정당합니까? 나는 아저씨가 말한 것들을 며칠 동안이나 계속 되뇌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생각해야합니까?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어떤 중요성을 가지기나 한다는 말입니까?>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어. 나는 수화기 너머에 있는 것이 그 청년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리고 그가 내 말들 때문에 며칠이나 계속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했다는 것도 말이야.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피로한 두 눈을 문지르면서 침묵했지. 그도 말이 없었어. 한동안 수화기에서는 지직거리는 노이즈만이 들렸네.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을 머릿속에서 고르고 있었어. 어떤 말이 가장 명증할까? 어떤 말이 가장 오해의 소지가 없을까? 뭐라고 말해야 이 고뇌하는 청년을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입을 뗐네. <세상에는…… 주인을 위해 잘 길들여진 개가 되는 것을 소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그리고 나는 계속 말했지. <선과 악이나 옳음과 그름을 믿는 자들도 있고, 보상과 처벌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지.> 청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네. <그런데 가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어나.>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탄식이 들려왔네. 나는 말을 이었네. <신은 죽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잣대는 사라지고, 심판은 허구이며, 존재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공허하게 내버려져있고, 숨통을 졸라오는 광막한 자유만이 펼쳐진 세상을 묵시하는 눈동자가.> 그리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어. 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지.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어. <그때 그는 세상과 똑같은 무게로 내던져진 자신을 바라보면서 깨닫지. 무얼 해도 상관 없다는 것을, 무엇이 되든 좋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철저하게 죽어 없어질 것이라는 것도.> 그제야 청년은 소리를 질렀어. <아!> 그리고 나는 그의 외침에 화답하듯이 말을 마쳤어. <이게 실존의 인간이야.>
침묵.
한이삭은 커피를 홀짝인다.
한이삭: 그리고 나는 얼마 뒤에 그에게 대답이 되었냐고 물었지. 그는 이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은 끝나지 않겠죠?> 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어. 그게 숙명이야. 나는 그에게 말해줬네. <하지만 의문이라는 것이 더 이상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게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내가 너에게 말했지? 표현을 하라고. 너의 의문과 끝없는 자문자답을 형태나 행위로 만들어. 그러면 너는…….>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네. 왜냐하면 나도 뭐라고 말해야할지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내가 답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단언할 수 없어! 나조차도 아직 살고 있는 중이야. 내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매번 상기하면서. 다행이도 청년은 내게 캐묻지 않았어. 그는 내게 조금 안정된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 전화를 끊었지.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불 위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잠이 들었네.
형호와 용대는 말없이 한이삭을 바라본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갑자기 한이삭이 벌떡 일어나면서 팔을 벌린다.
한이삭: (유쾌한 어조로) 자, 그런거야!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두자고. 사실 자네들은 그 청년과 만나본 적도 없고 별로 관심도 없지 않은가? 내게는 꽤 인상적인 만남이었지만 말야. 나는 다만 자네들이 내 최근의 행적을 알고 싶어하길래 무엇이든 떠오른 것을 말한 것 뿐이라네. 사실 모든 사건들은 다 엇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어. 예를 들자면 내가 얼마 전에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가 사이비 종교인으로 오해받고 차가운 대접을 받은 일을 얘기할 수도 있었겠지. 왜냐하면 그것도 내게 꽤 울적한 일이었거든. 그런데 내가 도대체 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더라? 아마 그때도 술에 취해있었던 것 같아. 흠. 뭐 아무려면 어떤가. 요는 내가…… 특별한 사건과 특별하지 않은 사건을 분간할 능력이 별로 없다는 것일세.
형호: 그건 아마도 자네의 특출난 무관심 때문일 거야.
한이삭: 아하, 그럴 수도 있겠지.
용대: 그런데 자네 술 취하면 아무한테나 말 걸고 다니나?
한이삭: 응, 내 나쁜 버릇이지. 아무래도 내 외로움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 아무나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실례합니다만!> 하고 말을 걸지. 그럴 때 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고 친절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것 같아.
용대: 그러지 말게. 사람들한테 폐야.
한이삭: 노력하겠네. 그보다 슬슬 일어나자고. 나는 배가 고파.
형호: (일어서며) 그럴까? 그럼 가지.
용대도 일어서며 무대 한쪽으로 다 함께 퇴장해간다.
한이삭은 그들을 따라가다가 불현듯 발걸음을 멈춘다.
형호와 용대는 퇴장하고 무대에는 한이삭만이 남는다.
그는 피곤한 눈빛으로 잠시 멍하니 서있는다.
한이삭: (한숨을 내쉬고) 끔찍한 일이야!
한이삭이 퇴장한다.
막.
2막
어두운 밤.
물소리가 들리는 강의 철교 위.
철교 꼭대기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주황빛 가로등이 켜져있다.
물 흐르는 소리만 고적히 흐르다가 얼마 뒤 한이삭이 중얼거리면서 등장한다.
그는 손에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있으며 비틀거리고 있다.
한이삭: (혼자서) 말하자면 말이야, 그들은 거짓 속에 살고 있는 거야. 거미가 자기 꽁무니에서 자아낸 실로 거미집을 짓듯이, 스스로 지은 거짓으로 집을 만들고 그 속에 틀어박혀서 사는거지. 하!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그게 본성이거든. 오히려 본성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은 진실되게 사는 것이지. 진실되게 산다는 게 뭐냐고? 그건…… 허무와 마주하는 거야…… 음, 그렇고 말고. 의식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그거지. 허무. 세상의 진면목. 사막의 빛깔. 말라붙은 샘.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짜 물들로 가득하지. 너무 많이 넘쳐흘러서 침수 되어버렸어…….
철교 꼭대기까지 도달한 한이삭은 휘청거리는 몸으로 난간을 넘더니 다리의 귀퉁이에 걸터앉는다.
그는 주섬주섬 비닐봉지에서 소주병과 육포를 꺼내 옆에 놓는다.
한이삭: 음,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보다 밤바람 때문에 강물에 파문이 이는군. 찰랑찰랑……. 넘실거리는 새까만 물살은 마치 검은색 천을 덮어 쓴 유령들 같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이리 와, 이리 와, 하며 말이지. 하지만 나는 안 가. 왜냐하면 난 너희 같은 천박한 망령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거든.
한이삭은 소주병을 열면서 계속 구시렁거린다.
한이삭: (머리 위를 바라보며) 오늘은 붉은 달이 떴군. 예전에 누가 그랬는데, 붉은 달이 뜨면 농사가 흉작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람. 술은 나무 수액으로도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 나는 신이 내게 준 것보다 악마가 선물해준 것들이 더 마음에 들어. 술, 담배, 커피, 향신료 등등…… 사막에서 대추야자 열매만 먹고 살다가는 영혼이 말라 비틀어져 버리지. 물론 그렇게 되면 그들이 그렇게도 지나가고 싶어하는 좁은 문을 지나갈 수 있겠지만…… 글쎄, 아마 그 문을 지나도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대추야자 열매 뿐일 걸. (웃는다)
그는 소주를 병 째로 마시기 시작한다.
무대에는 계속해서 물 흐르는 소리가 흐른다.
한이삭: (고개를 흔들며) 아, 날씨가 좋구나.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 이 캄캄한 밤과,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이. 태양이 잠을 자러 가니 오히려 빛이 더 강렬하게 빛나는구나. (다리 밑을 내려다보며) 달이 떠있네. 달이 두 개나 떠있어.
한이삭은 계속 다리 밑을 응시하면서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한이삭: (연기를 뿜으며) 나도 내 형제를 찾고 싶었지. 나와 영혼을 나눠 가진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었지. 그러나 만약 그 바람이 이루어졌더라도, 나는 결국 나의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을 거야. 인간과 인간이라는 것은 무서운 거야. 나는 내게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해. 나는 고아다. 어느 누구와도 피로 얽힐 일이 없는 나는 고아야! (소리내서 웃는다)
한이삭이 말을 마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젊은 여인과 어린 아이가 등장한다.
여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다리를 오른다.
가로등 옆에 다다랐을 때 즈음 아이가 한이삭을 손가락질하며 여인에게 무어라고 묻는다.
인기척을 느낀 한이삭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뒤돌아본다.
여인은 난감한 얼굴을 하며 아이의 손을 잡아 끈다.
여인과 아이가 퇴장한다.
한이삭: (고개를 다시 돌리며 자조적으로) 흥!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킨다)
한동안 한이삭은 넋을 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한이삭: 형호랑 용대는 지금쯤 집에 도착했겠군. 이제 내게 평범하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인간이라고는 그들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별 일은 없었어. 하긴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만나서 대화하고, 식사하고, 술마시는 것뿐이지. 이제 난 인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아. 호메로스에나 나올 법한 영웅들은 모두 멸종했지. 그렇다고 내가 그런 영웅들을 그리는 것도 아니지만 말야! 오히려 나는 그런 인간상은 질색이야. 내가 모범으로 삼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나 다자이 오사무의 요조 등이지. 그들은 나약하고 진지하거든. 아! 진지함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진지해지지는 못했지. (술을 마신다) 나는 내 뱃속의 내장을 잘라내고 내 살에 독을 바르는 데에 재미가 들렸어. 보라! 개인이 타락해야할 이유는 천 가지도 넘게 있다! 그러나 행복해져야할 이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 이 시대에 태어난 인간들은 의도적으로 부서질 필요성이 있어.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냄새 없는 공기이며, 폭풍조차 되지 못하는 바람이며, 잠결에 꾸는 꿈 같은 것이기 때문이야. 태초의 인간들은 좀 더 원색적이었지. 그리고 단단했으며 원론적이었지.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시대가! 역사가! (흥분해서 술병을 휘두르며) 우리는 썩은 기름이야! 역사의 시체가 썩어서 만들어진 석유야. 우리는 불타버려야 해!
한이삭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창백한 표정이 된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리 밑으로 구토를 한다.
강물에 구토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이삭: (고개를 숙인 채로) 아아, 아아, 아아, 아아아! 속이 다 상했군. 술 때문에 내장이 죄 썩어버렸어. (소리내서 웃는다) 좋아. 느껴진다. 무언가가 느껴져. 내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는, 나와 아주 친숙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고개를 들며) 아아, 어지럽구나. (한숨을 쉰다) 나는 누구에게 얘기하고 있지? 결국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얘기가 아닌가? 나의 이 강변을 도대체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결국 질 것이 뻔한 나의 전쟁에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어? 전쟁, 전쟁! 모두가 다 패배할 거야. 그리고 모두가 다 패배할 것이라고 알고 있어……. 내게는 동료조차…… 동료? 그러나 과연 누구를 동료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한이삭은 갑자기 입을 다문다.
십 초 가량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손에 들린 담배꽁초를 강물을 향해 내던진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읊조리듯이 중얼거린다.
한이삭: (낮은 목소리로) 한이삭.
한이삭은 새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얼마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며 가끔 술을 들이킨다.
그때 정장을 잘 차려입은 60대 중반 즈음 되어보이는 늙은이가 등장한다.
늙은이는 다리를 오르더니 난간 너머에 앉아있는 한이삭을 발견하고 발을 멈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있다가 한이삭에게 말을 건넨다.
늙은이: (큰 소리로) 젊은친구, 그런 곳에 앉아있으면 위험해!
한이삭은 고개를 돌려 늙은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본다.
그러더니 그는 씨익 웃으며 손짓을 한다.
한이삭: 아, 어르신! 이리로 오시오. 이리로 오시죠! 보아하니 어르신도 밤거리를 배회하는 갈 곳 없는 이방인 같은데, 이리로 와서 저랑 술 한 잔 하시지요!
늙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돌아갈 가정이 있다네. 내게는 마누라가 있고 아들도 있지. 갈 곳 없는 이방인은 혹시 자네 아닌가? 자네는 누구에게서든 자신의 얼굴을 보는 모양이군.
한이삭: (혼잣말로) 아! 늙은이의 통찰력이란! (늙은이를 향해)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리로 오시죠! 와서 저와 대화나 몇 마디 나누시죠.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도 아닙니다. 위험한 사람도 아닙니다! 아니, 위험하다면 위험하달 수는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 대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웃는다)
늙은이는 조금 망설이더니 한이삭이 앉은 난간으로 다가간다.
한이삭은 그를 보며 웃더니 다시 강물로 시선을 향한다.
늙은이: 자네는 왜 이런 시간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나? 그리고 왜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어? 그런 건 젊은이들이 할 일이 아닐세.
한이삭: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젊은이들이 할 일이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젊은이들은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고 여자와 만나고 미래를 칭송해야 할 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의 미래는 나의 가시덩굴 같은 과거에게 목이 졸린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엄청난 시간 속에서 단 한 가지 길에 속박되어버렸습니다. 나의 길에는 이제 교차점이 없어요. 나는 한때 산 꼭대기를 향해 돌덩이를 굴렸으나…… 그 돌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쫓아가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이 산의 내리막길은 끝이 없더군요. 나는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의 살과 뼈를 깎아먹으며.
늙은이: 방향을 틀게! 자네는 나 같은 늙은이보다 훨씬 방대한 미래를 갖고 있지 않은가?
한이삭: (웃으며) 아아, 어르신, 어르신!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따져보자면 어르신이 가진 미래의 양과 제가 가진 미래의 양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가 수(數)로 평등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나는 운명을 거부하지만 운명에게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그가 나의 목을 베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애초부터 내가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께는 운명이 있었습니까?
늙은이: 운명? 있었지. 나만큼 살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운명과 만나기 마련이라네. 나는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때때로는 돌기둥에 내 두골을 들이박기도 했지. 하지만 늙어간다는 것은 운명과 하나가 되어간다는 뜻이야. 그리고 마침내 내게 남은 것이 단 하나도 없게 될 때에 나는 세상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겠지!
한이삭: (탄식하며) 아! 당신은 인간의 절대적인 패배를 긍정하는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입니까? 인간과 세상의 경계선에 걸쳐있는 당신은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모든 젊음들이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입니까?
한이삭은 힘없는 손동작으로 담배꽁초를 강을 향해 내던진다.
늙은이: 젊은친구, 우리는 흙으로 되어있다네. 흙이 어떻게 바람과 대지의 움직임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가끔 바람에 날려 하늘 위까지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저 깊은 바다 밑바닥에 조용히 잠들게 되지. 나는 이제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네. 내 안의 숨결은 조만간 나를 떠날 거야. 자네의 부모님도 그것을 자네에게 몸소 가르쳐주지 않으셨는가?
한이삭: 내게는 부모가 없습니다.
늙은이: (높은 목소리로) 뭐라고! 그렇다면 자네는 인간의 전통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단 말인가?
한이삭: (마찬가지로 높은 목소리로, 유쾌하게) 그렇습니다! 나는 시간과 인간의 투쟁이 어떻게 되어갈 지에 대해서 전혀 보고 배운 바가 없습니다!
두 사람은 침묵한다. 늙은이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돈다.
늙은이: 나는 자네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네. 그러나 적어도 자네는 원시의 인간만큼은 강하겠군.
한이삭: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한이삭은 소주병을 들어 술을 들이킨다.
그리고 늙은이에게로 술병을 내밀지만, 늙은이는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한이삭은 병을 자신의 앉은 자리 옆에 내려놓는다.
한이삭: 그러나 나의 강함은 무지로 인한 강함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아는 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뿐입니다. 시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간은 누구도 없습니다. 나는 언젠가 맞게 될 나의 패배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긍정하지는 않는 것 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영원한 반항적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늙은이: 영원이라고? 자네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있는 건가?
한이삭: (들뜬 목소리로) 아, 그럼요! 어르신, 영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찰나입니다! 순간의 섬광이야말로 영원입니다. 아주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영원입니다. 영원은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에는 아주 짧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보다 높은 의식의 차원에서는 말 그대로의 <영원>이 되는 것입니다……. 젊음은 언젠가 노쇠하여 시들지만 영원한 젊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시간에게 대항하여 투쟁할 때 그의 영혼 속에서 빛납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영원을 소유할 수 있어요!
늙은이: 그것은 사람들이 위대함이라고 부르는 것이네.
한이삭: 그렇게도 부르죠. 아, 그러나!
한이삭은 탄식하면서 소주병에 남은 소주를 전부 마시더니 병을 내던진다.
그리고 등 뒤에 있는 난간에 재차 뒤통수를 박아댄다.
늙은이: (놀라서) 자네 왜 그러나?
한이삭: (머리를 박는 것을 그만 두고 슬픈 목소리로) 나는 어쩌면 위대함을 위하여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타락과 퇴폐였고 나는 산산히 부서져가는 인간입니다. 가장 원초의 것만이 남을 때까지, 나는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숩니다. 위대해지는 것은 오름의 길입니다. 시나이 산보다 더 높은 곳까지 향일성 의지로만 기어올라가는 투쟁의 길. 그러나 나는 계속 굴러떨어지기만 합니다.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타락하고 전락하고 침몰되어, 성자들은 물론 어떤 죄인들조차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나는 이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히려 즐겁기까지 합니다.
한이삭은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더니 마침내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그런 한이삭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얼마 뒤에 입을 연다.
늙은이: 자네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군.
한이삭: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결국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립니다.
한이삭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려 늙은이를 바라본다.
한이삭: 어째서인지 어디선가에서 어르신을 뵌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늙은이: 그런가? 사실은 나도 그렇다네. 자네는 내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어.
한이삭: 그거 재미있군요. 그게 누구입니까?
늙은이: 글쎄. 말하려고 하니 잘 떠오르질 않는군. 아무튼 자네의 얼굴 생김은 몹시 익숙해.
한이삭: 어쩌면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늙은이가 웃는다.
한이삭은 비닐봉지에서 소주병을 하나 더 꺼내더니 육포 봉지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 씹기 시작한다.
한이삭: 드시겠습니까?
늙은이: 아니, 됐네.
한이삭은 한동안 육포를 씹는다.
한이삭: 사실은 오늘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만나기 전부터 취해있어서 벌써 기억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물론 지금도 취해있습니다만!
늙은이: 자네는 술을 많이 마시는 모양이군.
한이삭: 아, 그럼요! 나는 많이 마십니다. 때때로 내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지 못할 때까지 마십니다. 나는 계속해서 지독한 독을 내 내장에 쏟아부어요.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도 기적입니다. 나는, 흠, 글쎄요…… 자살이라…….
늙은이: 자살? 자네는 죽고 싶어하는 건가?
한이삭: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능동적으로 죽으려고 들지는 않아요. 자살은 반항의 반댓말입니다. 그것은 세계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인간에게 소리를 지르죠.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야말로 세계와 대립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나는 사실 열심히 살지도 않아요. 독액을 내 뱃속에 흘려넣으며 천천히 스스로를 죽이고 있죠. 의식만이 썩은 시쳇물 위에 고요한 숨결처럼 부유하고, 세계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주시합니다. 흠, 그래, 이제 어떻게 되어가나 어디 한 번 보자고,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요.
늙은이: (혼잣말로) 아! 불쌍한 자여!
한이삭: 어쩌면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나의 형제는 내가 감히 시도하려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불타는 듯한 젊음과 불만족이 있거든요. 그는 아직 나처럼 부패하지는 않았죠.
한이삭은 말하면서 소주병을 딴다.
한이삭: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내가 벌써 젊은이들에게 내 꿈을 안겨줘야할 나이가 되다니! 이건 정말이지 우습지도 않은 일입니다. 사실 나는 그 정도로 늙지도 않았어요. 다만 나의 영혼이, 나의 의식이, 너무 닳고 중독되어서…… 이제 더 이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늙은이: 그 말은 즉 자네가 한계에 달했다는 건가?
한이삭: 그래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나는 인간으로서 거의 한계에 달했습니다. 나의 친구들도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더군요. 한이삭이라는 인간은 이제 높은 곳에서 떨어진 돌처럼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라고.
늙은이: 자네 이름이 한이삭인가보군.
한이삭: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사실 이름 따위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만.
한이삭이 소주병을 들어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한이삭: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아, 토할 것 같구나! 내 내장은 물론 영혼까지 전부 토사물과 섞어서 내보내버릴 것 같아! 토하기 위해 먹고 마신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짓입니까? 그러나 사실은 내가 하는 짓거리가 모두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오물을 뱉어내기 위하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에게는 소화기관이 없습니다. 내 식도는 배를 향해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막다른 길을 만납니다. 그리고 내가 삼킨 것들은 온 길을 도로 돌아가 입으로 뿜어져나오죠.
늙은이: 자네는 아무 것도 소화시켜서 자네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건가?
한이삭: 아주 잘 지적하셨습니다. 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다른 인간들처럼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내게 세계는 항상 날 것 그대로의 상태이고 나는 세계 속에 동화되지 않는 하나의……
한이삭이 하던 말을 멈추고 갑자기 강물을 향해 토악질을 한다.
그는 기침을 하고 침을 뱉더니 손등으로 입을 닦는다.
한이삭: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음, 모르겠습니다. 사실 잘난 듯이 지껄였지만 나는 나 자신을 언어로 정리할 만큼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한이삭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한 개피 뽑는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물고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인다.
한이삭: 그런데 어르신,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다리 위에 주저앉아 처량하게 술을 마시는 폐인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나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했습니까?
늙은이: (한이삭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다리를 건너는데 자네의 등돌리고 앉은 뒷모습을 볼 때부터 나는 왠지모를 친근함을 느꼈지. 자네의 등에 자리잡고 앉은 광기가 나를 두렵게 하기는 했지만 나는 자네에게 말을 걸고 가능하다면 손을 내밀어서 난간 이쪽 편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외친 거지. 그곳은 위험하다고.
한이삭: (중얼거리며)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늙은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당신은 내게서 누구의 얼굴을 발견했습니까?
늙은이: (한이삭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아! 그래! 자네는 내 아들을 닮았어. 이제야 알겠군. 자네는 내 아들과 닮았어. 아까 내게 아들이 있다고 말했지? 그러나 사실 그 아이는 내 둘째 아들일세. 장남은 그 아이가 아직 어린아이일 때 잃어버렸지. 한 번도 그 애를 잊은 적이 없어. 마누라가, 그 애가 갓난아기일 때 장에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렸지. 삼 일 밤낮을 마누라를 타박하며 울고 삼 년을 그 애를 찾아다녔네. 그러나 결국 포기했어. 그리고 둘째를 낳았지. 다 잊은 듯이 살면서도 가끔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그래, 그 애가 살아있다면 마침 자네 정도의 나이겠군. 자네는 내 아들과 닮았어!
한이삭은 아무 말도 않다가 술병을 내려놓고 담배를 문 채 일어선다.
그리고 늙은이의 코앞에 얼굴을 두고 한참을 그와 마주본다.
그러다가 한이삭의 얼굴이 갑자기 끔찍한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늙은이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린 뒤 다리 밑으로 집어던진다.
첨벙하는 물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진다.
한이삭은 손에 담배를 쥐고 여전히 흥분한 기색으로 다리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이삭: (헐떡이며) 필요 없어.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과실은 영원하지 않아.
한이삭은 허리를 굽혀 소주병을 집어 들더니 선 채로 전부 다 마셔버린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든다.
그는 느리게 눈을 껌뻑거리다가 담배를 깊게 빨고 숨을 내뱉는다.
한이삭: (신음하듯이) 전쟁.
그리고 한이삭은 비틀거리면서 앉으려는 듯한 동작을 보이다가 발을 헛디딘 듯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다리에서 떨어진다.
아까와 똑같은 첨벙하는 물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진다.
이제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다.
물 흐르는 소리 속에 십 초 정도 가로등만이 고요하게 빛난다.
막.
3막
장례식장.
중앙에 한이삭의 영정사진과 관이 놓여있고 조화가 세 개 정도 서있다.
영정사진을 중심으로 무대의 좌우에 앉은뱅이 식탁이 하나씩 놓여있다.
식탁에는 음식 그릇과 술병들이 놓여있다.
그 중 왼쪽의 식탁에는 형호와 용대가 앉아있고 오른쪽 식탁에는 사제복을 입은 목사가 앉아있다.
형호: 이렇게 갈 줄이야. 아니,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
용대: 그래. 이런 죽음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기는 해. 하지만 너무 빨랐어.
형호: 우리와 헤어진 뒤에 술에 취한 채로 강물에 떨어졌다지? 내가 집까지 바래다줬어야 했어! 너무 취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였는데.
용대: 자네 탓이 아니야. 언제가 됐든 간에 이삭이는 결국 이렇게 죽었을 거야. 생각해보게. 그의 삶에 도대체 어떤 희망이 있었겠느냔 말이야.
형호: 없었지. 그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손톱만큼도 없었지! 마치 일부러 희망을 거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어.
형호는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
용대: 슬픈가?
형호: 그래, 슬퍼!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슬픔 뿐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감정 또한 자리잡고 있군. 안도와 비슷한…….
용대: 그럴 수 있지. 그의 삶은 불안 그 자체였으니까. 그에게서 삶이 떠나버린 이제야 드디어 한이삭은 안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야.
형호: (안타까운 목소리로)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 물론 우리는 모두 다소간에 그와 닮기는 했지. 방황하고 불안에 떠는 필멸하는 존재들이란 말일세. 그러나 인간은 모두가 안정될 수 있는 여지를, 그러한 공간을 찾기 마련이야. 하지만 한이삭은 끝까지 어디에도 내려앉지 않았어!
용대: (무덤덤하게) 그러다가 결국 죽음에 내려앉았지.
용대는 술잔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한다.
형호는 이마에 손을 짚더니 감정을 추스른 듯 입을 연다.
형호: 어지간히 연락할 사람이 없더군.
용대: 뭐가?
형호: 이 장례식 준비할 때 말이야. 경찰한테 이삭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그가 다녔던 고아원을 수소문해서 찾아냈지. 그리고 원장한테 연락하니까 이삭이가 그곳에 재적되어 있을 때의 전 원장을 찾아야 되더군. 그렇게 해서 그 전 원장과 연락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이삭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용대: 어떻게 원아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겠어?
형호: 그렇기야 하지. 아무튼 그래서 그때 그에게 친구가 있었느냐고 물어보자 그것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당시 주임목사였던 사람을 소개시켜 주던데…… (턱끝으로 목사를 향하며) 그게 저 사람이야.
용대: 고아원에서 건진 것은 그 뿐인가?
형호: 그래. 그리고 그가 다녔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연락처는 다 구해놨는데, 딱히 연락을 할 건덕지가 없더군. 아무튼 그의 담임이었던 교사들에게는 한 번씩 전화를 넣었어.
용대: 아까 다녀간 노인네들이 그들인가?
형호: 그래.
용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데.
형호: 아마 누군지 기억도 잘 못할 거야.
용대: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하니 추측해볼 도리도 없군.
형호: 한이삭이 언제부터 그런 파멸적인 인간이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지.
용대: 결국 그의 옛날 친구들도 알아내지 못한 건가?
형호: 맞아.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 친구들은……
용대: 이삭이가 그다지 사교적이진 않았지.
형호: 그렇다고 행동이 소극적인 것도 아니었고.
침묵.
갑자기 용대가 두 팔을 펼치며 외친다.
용대: (큰 소리로) 내 생애 이렇게 썰렁한 장례식은 처음 보는군! (한이삭의 관을 가리키며) 이 녀석은 살아 생전 여자도 한 명 안 만났단 말인가?
목사가 용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형호: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이봐, 그만해.
용대: (들은 척도 않고 목사에게) 이보시오, 목사님. 이리로 오시지요. 당신도 한이삭을 기억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시간까지 여기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까? 이리 와서 당신이 아는 한이삭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사는 느릿느릿 일어서더니 용대와 형호의 식탁으로 와서 앉는다.
형호가 술잔을 내밀지만 목사는 손을 내밀어 거절한다.
목사는 늙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목사: 여러분은 한이삭의 친구들인가요?
형호: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학시절 친구들입니다.
용대: 친구라고 한다면 친구이기는 했지요.
목사: 나는 그가 고아원에 다닐 적에 주임목사였던 사람입니다.
용대: 그 고아원은 기독교 재단에서 만든 곳이었는 모양이죠?
목사: 맞아요. 그래서 원아들은 매주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나와야 했죠. 매일 교리 공부를 하는 시간도 있었고요.
형호: 흠, 이삭이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종교적인 영향권 내에서 자랐을 거라고 상상하기는 힘든데.
용대: 그는 어떤 아이였죠?
목사: 내 기억에 그는 겉보기에는 그다지 유별날 게 없는 아이였어요.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고, 사람을 쳐다보는 눈이 깊은 구렁텅이 같아서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운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신학 공부 시간이나 예배 시간에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요…….
용대: 그건 의외인데.
형호: 그러게. 날 때부터 신성모독자였던 것 같은 그가 말이야.
목사: 신성모독자라. 그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군요. 아무튼 간에…… 하지만 어느 날 사건이 있었어요. 그저 조금 조숙한 것처럼만 보이던 아이가 껍질을 벗고 광증의 나비가 되는 날이 온 거죠.
용대: (혼잣말로) 아, 역시 이 사람에게 말을 걸기를 잘 했어. 성직자들은 인간이 타락하는 순간을 가장 잘 발견하는 법이지.
목사: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몰라요. 다만 어느 날 예배 시간에 한이삭이 조금 늦는다 생각했더니, 얼마 지나서 흙과 먼지투성이가 되어 예배당에 나타난 겁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는데,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군요. 그런데 나는 순간 흠칫하여 뒤로 물러설뻔 했어요. 한이삭은 마치 눈빛으로 불태워 죽일 듯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겨우 열 살이나 넘었을 나이의 그 아이가 그런 눈빛을 하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목에 걸린 십자가를 손으로 쥐었죠. 그의 눈동자 속에서 지옥에서 아우성치는 죄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죠. 하지만 한이삭은 침묵을 지켰어요. 그러더니 그는 결국, 시선을 내려 땅을 쳐다보더니, 불현듯 웃으며 내게 말했죠. <아뇨, 아무 것도 아니예요 목사님! 뒷산에서 조금 굴렀을 뿐이랍니다!> 아, 그 희한한 웃음이라니! 그 이상하고도 유쾌한 어조라니!
형호: 이건 상상이 가는군.
용대: 말투부터 표정까지 전부.
목사: 그날 그가 산에서 무얼 보고 왔는지, 무얼 하고 왔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을 경계로 한이삭의 인생은 완전히 얼굴표정을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배당에서 자주 사탄의 현혹과 이단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는데, 그럴 때마다 한이삭에게 눈이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악마와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적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떤 이채로운 섬광이 번뜩였거든요. 그리고 그는 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습관처럼 외우고 다녔는데, 그 구절은 바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였답니다.
용대: 알 만하군. 나이는 어려도 우리가 아는 그 한이삭이야.
형호: 그래. 산에서 무얼 봤든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거야. 중요한 것은 한이삭의 기질적인 광기를 뭔가가 일깨웠다는 점이겠지. (목사를 향해) 그런데 목사님, 이삭이의 이름을 지은 것이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목사: 아, 그것은 바로 납니다. 내가 이름을 지었지요. 처음 고아원에 왔을 때 그 아이는 이름도 무엇도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원장님과 상의해서 내가 이름을 짓기로 했지요. 나는 그 아이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용대: (형호를 향해) 이름대로 자라긴 했군. 그렇지?
형호: (웃으며) 그래. 비록 그 이름을 붙일 때 목사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말야.
형호와 용대는 킬킬거린다.
목사는 우울한 표정.
형호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른다.
형호: (머뭇거리더니) 결국 변하는 것은 없군! 한이삭은 죽었고, 그를 이해할 수 있거나 혹은 이해했던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 그는 부모도 가족도 없고, 장례식장에 와주는 친구라고는 단 두 명 밖에 없으며,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에게는 두려움마저 사고 있군. (술잔을 들어 들이키고) 우리는 그가 죽은 뒤에도 그에 대해서 더 알게 된 것이 없어!
형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무대 한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간다.
형호: (극적으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노라! 이제 한이삭의 눈으로 세계를 발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었던 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되살아나리라. 불안한 용해액으로 검붉게 물컹거리던 세상은 다시 기계장치처럼 곧게 서리라. 톱니바퀴는 돌아가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자리에 눕겠지. 인류는 한때 인격화된 불안을 얻었다가 지금 잃어버렸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우리 세 사람 뿐이다!
용대: (목사에게) 저 친구 취했군요.
목사: 한이삭이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인상적인 인간이었나요?
용대: 말하자면 그렇죠. 사실 나는 지금껏 이삭이만큼 인상이 강렬한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가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다만 이상성만큼은 증명하죠. 역시 당신도 이삭이가 살아있을 때 다시 만나보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의 미치광이 같은 언행은 마주하는 사람의 신념을 굉장히 불안하게 만듭니다. 주로 그 점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만은…….
형호: (용대에게 큰 소리로) 이봐 용대! 이삭이가 우리에게 말했던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결국 그 청년의 연락처를 알아내지 못했어. 아마 그는 영원히 한이삭이라는 인물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겠지. 이삭이가 우리에게 들려줬던 그들의 대화가 정말이라면, 그만큼 그들의 관계가 깊고 기이한 것이었다면 말이야, 그 청년은 어떻게 될까? 청년에게 영감을 주었던 이삭이는 죽어버렸으니 말이야! 어쩌면 그도 이삭이처럼 되지 않을까? 아니면 이삭이가 말했던 <위대함으로의 길>로 갈까?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더 어려운 길은 어느 쪽이지? 의도적으로 한계까지 파괴되고 타락하는 것? 아니면 신도 없는 오름길을 죽을 때까지 걸어올라가는 것? 나 같은 범인은 모르겠어! 나는 그냥 내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생활만으로도 벅차. 내 영혼은 딱 삶만을 위한 분량만큼만 자라있어. 나는 그들처럼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가지는 욕망조차 이해할 수가 없네!
용대: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들 이해하겠어? 그들은 위대하거나 특별한 인재들이 아니야. 그냥 불량품이지. 뭔가가 너무 과잉되거나 너무 결핍된 인간들이라고. 그들은 분명 눈에 띄지만, 그건 단지 그들이 이상하기 때문이야. 자네는 한이삭이라는 부적응자를 너무 미화하고 있어.
형호: 아!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우리의 영혼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최적격의 영혼이고, 그들의 영혼은 말라비틀어지거나 너무 비대한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악마가 선량한 인간을 홀리려고 만들어낸 조잡한 함정일지도 모르지.
용대: 그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필요 이상의 생각은 인간을 망가트려. 망가지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한이삭처럼 되는 거야. (한이삭의 관을 가리키며) 저렇게 된다고.
형호가 숨이 가쁜 듯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형호: 아, 힘들군. 한잔 두잔 하다가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돌아가세. 돌아가자고. 오늘 밤은 여자의 냄새가 그립군. 그녀들의 머리결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젖 냄새가 말이야. 오늘 밤에는 여자를 품고 자야겠어. 이삭이가 차가운 목재 관 속에 강물에 불어터진 사체가 되어 누워있을 때, 나는 만개한 꽃을 따서 향기를 맡고 과즙이 터져흐르는 과실을 베어물어야겠어. 친구여, 가세. 나를 좀 부축해주게.
용대: 그래, 가자고.
용대는 형호에게로 다가가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목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용대: 우리는 가겠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웬만큼 계시다가 가십시오.
목사: (손을 들어 보이며) 잘들 가세요.
형호: (목을 젖힌 채로 외치며) 그가 죽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야!
형호와 용대가 퇴장한다.
목사는 식탁 앞에 앉은 채로 멍하니 있더니, 식탁 위에 늘어선 술병들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넘어트린다.
빈 술병이 넘어지면서 소리를 내고 구른다.
목사: (생각에 잠긴 채) 그래, 그 아이는 죽었구나. 내 방대한 기억들 중 아주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어떤 기억보다도 강렬한 두려움으로 빛나는 기억 속의 그 아이가 이제는 죽었어. 하나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이 땅에 내려보내셨습니까? 그리고 또 무슨 뜻으로 그를 데려가셨습니까? 그는 당신에 대한 인간의 몰이해 그 자체였습니다!
목사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고 있을 때 한이삭의 관 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그리고 얼마 뒤에 수의를 입은 한이삭이 관에서 천천히 일어난다.(이때 관뚜껑은 열리지 않는다. 마치 한이삭이 닫힌 관뚜껑을 빠져나오듯이 연출된다.)
그는 한동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그는 등 뒤에 있는 자신의 영정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참 들여다본다.
마침내 한이삭은 영정사진에서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두 손을 마치 생전 처음보는 물건인 듯 신비롭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폭발하듯이 소리를 지른다.
한이삭: (비명 지르듯이) 이게 뭐야아!
한이삭의 외침 소리에 깜짝 놀란 목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목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한이삭: (흥분하여 아주 빠른 어조로) 이게 뭐야,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영정사진을 살피며) 내가 죽었다고? 그래, 물론 그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 살아있는 이상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야 해. 왜냐하면 운명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우리들 손에 있지 않거든. 그것은 납득할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죽었을 수도 있어! (갑자기 관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며)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죽었는데 내가 여기에 있다고? 혹시 이건 누군가의 장난인가? 예를 들자면 형호나…… 아니지, 용대가 더 의심스럽군. 그 친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걸음을 멈추더니 관뚜껑을 슬적 열어본다) 맙소사!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누워있어! 혹시 인형인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끔찍한 얼굴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지. (관뚜껑을 닫고 다시 관 주변을 돌기 시작한다) 어디보자. 난 아마도 죽었어. 그래! 난 드디어 죽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여기 내가 두 발로 일어서서 생각을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잖아?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촌극인가? 영혼이라고? 사후세계라고? 유령이라고? 그래, 이건 장난임에 틀림이 없다. 이건 바로 그 빌어먹을 신의 장난이야! (머리 위를 향해 주먹을 흔든다) 망할 것! 이번엔 이런 방법으로 나를 갖고 노는군! 아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당신은 늘 그렇지. 늘 그렇게 인간의 양심과 신념을 장난스럽게 갖고 놀지! 그러면 즐거운가? 당신의 권좌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니 매사가 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모양이지? 이 권태의 왕아! 그래! 당신은 권태의 왕이야!
한이삭이 잠시 말을 멈춘 사이에 목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이삭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외친다.
목사: 한이삭!
한이삭: (목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응? 누구지? 당신은 누구시오 신부님?
목사: 누구냐니, 내가 기억이 안 난단 말인가? 그보다도 나는 신부가 아니라 목사야!
한이삭: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목사님. 그래서 당신은 누구시죠?
목사: 고아원! 네 이름을 지어준 사람!
한이삭은 목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샅샅히 뜯어보더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며 두 팔을 벌린다.
한이삭: (반가운 목소리로) 아하! 우리 목사님이로군! 왜 이렇게 늙으셨습니까? 이렇게 변했으니 내가 못 알아봤지.
목사: 그래, 나는 늙었지. 네가 어른이 된 만큼 나는 늙었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네가 죽었다는 것이다!
한이삭: 아, 그건 나도 알아요. 방금 내 시체를 확인한 참이니 분명하지.
목사: 나는 지금 네 영혼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이 놀랍지 않은 거냐?
한이삭: (자신의 수의를 손으로 펄럭거리며) 흠, 글쎄요. 전혀 예상하지 못하긴 했죠.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신이나 사후세계 같은 것이 없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습니다만. 뭐 별 수 있나요. 아까는 흥분해서 그만 신에게 삿대질까지 해버리기는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목사: (떨리는 목소리로) 호산나!
한이삭: (한숨을 내쉬며) 호산나는 됐어요.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나저나 내 장례식이지만 참 썰렁하군. 조문객이라고는 목사님 한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목사: 자네 친구들은 아까 다녀갔어.
한이삭: 그렇군요. 친구들이라! 아마도 형호와 용대겠지. 달리 내게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으니…… 내가 죽었다고 연락을 하면 와줄 사람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이렇게 휑뎅그렁한 장례식도 나쁘지는 않군.
목사: 불쌍한 아이야! 나는 네가 어릴 때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네가 부정한 길로는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는 이제 죽어버렸으니 더 이상 미래조차도 없고, 네게 남은 것은 심판 뿐이구나!
한이삭: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며) 심판이라.
한이삭은 한동안 멍하니 말이 없더니 갑자기 반쯤 감긴 눈동자로 목사를 바라본다.
한이삭: 심판. 그래요. 그 오만한 왕이 마침내 내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겠군요.
목사: 네게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어!
한이삭: 기회라! 아, 그럼요! 기회는 넘칠만큼 있었고 나는 그걸 전부 다 써버렸죠. 타락과 퇴폐와 파괴와 잔인성과 신성모독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악한도 죄인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의 본질에 더 충실했을 뿐이죠.
목사: 너는 본성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했어!
한이삭: 하지만 저는 그 본성 때문에 나 자신의 존재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목사님은 평생 동안 느끼지 못할 그 경이를요! 나는 아름다움이란 영원이 아니라 순간에 있으며, 신성함은 성자들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죽어가는 약하디 약한 인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 나는 여전히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만 나는 네가 가여울 뿐이구나!
한이삭: 아,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도 다 글러버렸군요. 갑자기 신의 조악한 손짓이 느껴지고, 그가 나를 영원 속으로 처넣을테니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결국 어느 길로 가든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죽음만이 인간을 성스럽게 하는데, 저 사악한 왕이 그것을 빼앗아가버렸어요. 이제 인간은 한낱 도구나 기계장치에 불과합니다. 사멸하는 것에만 진정한 영혼이 깃든다는 것을 누군가가 얼른 깨달아주었으면! 제가 가엾다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저는 가엾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가엾습니다. 위대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이러한 법칙 속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가엾습니다!
그때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더니 무대 한 구석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그리로 천사가 나타난다. 천사는 잘 차려입은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다.
그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데, 그것은 천사가 퇴장할 때까지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한이삭: (천사를 쳐다보며) 당신은 누구시오?
천사: 당신을 데려갈 사람입니다.
목사: (떨리는 목소리로) 할렐루야!
한이삭: 아, 그래. 그렇다면 보나마나 그의 종이겠군.
천사: 예. 이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한이삭: 그래요 그래. 나 같은 놈 때문에 일부러 오르락 내리락, 고생하는군.
한이삭이 천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한이삭: 그런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당신도 내 인생을 보았소?
천사: 보았지요.
한이삭: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지.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오?
천사: 타는 불길로 만든 것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한이삭: (웃으며) 그거 괜찮은 대답인데.
천사: 하지만 그런 것은 인간이 가질만한 것이 못 됩니다. 게다가 그 분은 인간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고 계시지도 않고요.
한이삭: (한숨을 내쉬며) 그야 그렇겠지. 그래서, 이제 나는 어디로 가오?
천사: 심판을 받으러 갑니다.
한이삭: 번거로운 짓을 하는군. 그런 것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야.
천사: 그건 그렇죠.
한이삭이 천사를 보더니 큰 소리로 웃는다.
한이삭: 그래?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도 알고 있겠군?
천사: 그건 제 소관이 아니긴 합니다만은, 대강 예상은 할 수 있죠.
한이삭: (능청스럽게) 어디로 갈 것 같은데?
천사: (여전히 미소를 띈 얼굴로) 지옥이요.
한이삭은 마침내 박수를 치면서 마구 웃어댄다.
한이삭: (웃으며) 그거 마음에 드는데! 그렇다면 갑시다. 어서 갑시다!
한이삭은 잰걸음으로 퇴장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발을 멈춘다.
한이삭: 아차차, 그렇지. (황망하게 서있던 목사를 향해) 목사님, 저 갑니다!
목사: (깜짝 놀라서) 한이삭!
한이삭: 저는 갑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인데, 이름 고맙습니다!
한이삭은 인사를 위해 손을 내밀며 천사가 들어온 곳으로 퇴장한다.
천사는 그런 한이삭을 가만히 눈으로 쫓다가 느린 발걸음으로 한이삭을 쫓는다.
그때 한이삭이 퇴장한 채로 외친다.
한이삭: (목소리만) 가는 길에 담배 한 갑 사가지고 갑시다!
천사: 그렇게 하시죠.
천사가 퇴장한다. 그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꺼진다.
썰렁한 무대 위에 얼이 빠진 목사만이 서있다.
막.
<아픈 피>의 작의(作意)
임명준
장막 희곡 <아픈 피>는 한가지 돌발적인 떠오름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허상의 관념들을 창조해내어 그것을 자신의 영혼에 옷처럼 입히고 갑옷처럼 걸쳐놓았다. 그것이 너무 과잉되고 무거워서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길을 거닐거나 손을 들어 보일 수도 없다. 고로 현대인은 더 이상 창조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들이 해야하는 것은 파괴와, 의도적인 <내려감>이다. (본작 18p. “우리는 썩은 기름이야! 역사의 시체가 썩어서 만들어진 석유야. 우리는 불타버려야 해!”)
나는 우선 하나의 인물상을 만들어내야했다. 의도적인 타락과 퇴폐에 물들여져있고 법과 도덕을 파괴하며 기존의 신성에 저주를 퍼붓는 신성모독적인 인물을 말이다. 그러나 그 인물은 자연스러운 악당이 아닌 관념과 윤리의 과잉 상태에서 탄생한 부자연스러운 인물이어야했다. 그래서 <아픈 피>의 주인공 한이삭에게는 과거뿐만이 아니라 혈연관계조차 없다. 그는 필연적이지만 갑작스럽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격을 갖춘 하나의 조롱이 담긴 철학 체계에 가깝다. 그는 일부러 과장스럽고 유쾌한 말씨와 몸짓을 사용함으로서 스스로의 비극성을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비극은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지 벌써 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망령이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두 눈으로 묵시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다. 그는 늘 화가 나있고 불만에 찬 상태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거나 진지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술과 담배에 절어 감각을 마비시키고 광대처럼 웃음으로써, 그 기괴한 인물을 관찰하는 관객들에게 무언가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극의 대부분은 대화로 이루어진다. 나는 한이삭의 대사에 의미가 거대하고 오해의 여지가 많은 관념어(觀念語)들을 굳이 제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서 그의 비현실성에 정도를 더하고 그가 제시하는 문제들의 본질적인 막연함과 그것에 대해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인간적인 무력감을 강조했다. 극중에서 한이삭이 보여주는 기행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향력에 만족하지 못하는 미물이 <권력자>에게 자신의 불만족을 표현하기 위해 발작하는 것에 가깝다.
인간을 초월한 <권력자>. 즉 신의 존재는 극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극중에서의 신에 대한 논의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의 존재의 그림자와 그 영향력 밑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존재의 막연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의식(意識)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그 논의에서 한이삭은 끊임없이 자신의 타락과 퇴폐, 그리고 자기파괴에 대한 정당성을 징그러운 논리로 부르짖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은근히 <위대해지는 것>에 대한 향수를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3막에서 한이삭이 유령이 되어 깨어나기 전까지, 개인의 실존 조건을 의식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뚜렷하게 제시된다. 하나는 자신의 인간 조건과 한계에 끝없이 반항하며 위대함을 찾는 <오름 길>이며, 다른 하나는 한이삭이 선택하여 우리의 관객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고 있는, 국가와 사회, 도덕과 윤리 뿐만이 아니라 신성과 자기자신까지도 부정하고 파괴하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차원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내림 길>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대비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 길은 한이삭이 유령이 되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얄팍한 영원성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의 지저분한 구덩텅이로 합쳐진다. 차라리 이 극 전체가 <우리의 영혼에 어떤 법칙과 계명이 이미 낙인찍어져 있을 경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상상함으로서 인간이 실존적 의식으로 존재할 때에만 어떤 위대함이나 아름다움, 혹은 적어도 독자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