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1. 중반까지는 짝퉁 이방인. 앞으로는 아이디어 없을 때는 억지로 짜내지 말아야겠다.
2.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사실적 상황에서 부조리적 상황으로 흘러가는 흐름이 좋다고 한다.
3. 막판에 주인공이 좀 실성한 것 같다.
수영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 내가 전화로 여동생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과 하얗게 샌 머리카락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싶었다. <이것도 비극이지.> 나는 생각했다. 그는 가족의 죽음을 벌써 두 번이나 겪은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는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여도 될 만큼 충분히 늙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필요 이상으로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 물론 아버지의 처지가 가엾기는 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렇게나 젊고 원기 왕성했던 아버지가, 어느새 주름지고 고독한 늙은이로 변해간다는 것을 인지한 시점에서부터 그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다 가엾다. 그러나 무얼 어쩌겠는가. 원래 살아간다는 것은 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동생이 지금 몇 살이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 학생인 것은 분명했다. 흠, 그러나 학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이제 와서 뭐 그리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벌써부터 그녀는 잊혀져가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사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동등하다. 아, 그렇다. 삶과 죽음은 바로 같은 자리에 있다. 흔히들 그것을 동전의 앞뒷면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실상은 그 정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의 기회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아이의 죽음은 어딘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째서 그녀는 나보다 더 빨리 <기회>를 잃게 되었는가? 그런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씩 그런 순간이 오면 사람들은 신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아버지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은 아버지보다 더 늙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나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그 누군가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조차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합선된 전선에서 갑자기 스파크가 튀는 것만큼 순간적이고 기계적인, 어떤 착오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에게는 내일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주변이 조용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보니 동료 사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소의 어색함을 느껴서 무어라고 말을 떼볼까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옆 자리의 C에게 물었다.
“들렸나?” C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들은 게 맞나?” C가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휴가를 내야겠어.”
C는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은 힘들다. 그리고 딱 필요한 만큼의 말만 하는 것은 그보다 더 힘들다. 굉장한 이성과 통찰의 격투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C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내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작업하고 있던 서류가 흐트러져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아서 가지런히 하고, 내려놓았던 연필을 집어 들었다. 나는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사무실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흐르기 시작하고, 동료 사원들도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상사가 괜히 <어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사무실은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사십 분 가량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것이 일단락되자 연필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손끝에서 나무와 흑연 냄새가 났다. 데스크 뒤편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는 노란 햇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살 사이로 먼지들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사무실의 이 침착한 공기를 언제나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사십 분 전의 전화 때문에 다소 당황하기는 했지만 조금씩 평온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누군가가 거래처 사람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작업을 하느라 피곤해진 눈을 좀 문지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상사에게로 가서 며칠 간 휴가를 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여동생이 죽었노라고, 그래서 본가로 올라가봐야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무어라고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 말을 꺼내야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사려니 싶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데스크 앞에 서있었다. 그는 잠시 뒤에 위로의 말을 꺼내더니, 며칠 간 쉬다 오라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잠시 뒤 내가 고맙다고 말을 해야 했던 것인 지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상사는 오늘 내게 일찍 퇴근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퇴근 하는 것은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우선 해야 할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남들보다 조금 먼저 퇴근했다.
바람이 포근했다. 태양은 지고 있는 중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배가 고픈 것을 느꼈지만 식욕은 없었다.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날씨가 온화했기 때문이다. 요 며칠간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바람도 잔잔했고, 무엇보다 은근히 내리쬐는 노을빛이 기분이 좋았다. 나는 문뜩 바다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바닷가에도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었다. 가을이었다. 길가에 있는 어느 빌딩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마디가 귓가를 스쳤지만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이상한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식욕은 없었지만 식당에 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일부터 나는 휴가고, 술을 한 잔 쯤 마실 수도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는 아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은 학생 때나 할 법한 짓이다. 나는 취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자극적인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 내일부터 휴가다. 나는 괜히 입속말을 되뇌어보았다. 정신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집 주변에 있는 단골가게로 갔다. 시멘트로 지어진 허름한 식당이었다. 나는 구석 자리 테이블로 가서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점원이 다가왔다. 그와는 면식이 있었다. 그는 3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덩치가 큰 남자였는데, 몇 번인가 얼굴을 익힌 뒤로부터는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메뉴판을 들고 다가와서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평소보다 일찍 오셨군요.”
“아, 회사 업무가 일찍 끝났거든요.” 나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눈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메뉴 중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도 한 병.”
“맥주요. 평일에 술을 드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내일부터 휴가라서요. 한 병 쯤이야 괜찮겠죠.”
점원은 넙데데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주방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가 돼서야 알아차린 것인데, 가게 안에는 나 말고도 손님이 두 명 더 있었다. 그들은 입구 쪽 구석 자리에 앉아서 파리한 눈빛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둘 모두 굉장히 늙은 남자들이었다. 보통 그런 나이의 늙은이들은 술이 들어가면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몹시 조용하게 연신 술잔만 비워대는 것이었다. 나는 괜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들에게 대화를 걸어볼까 하였지만 곧 그만두었다. 내 호기심이라는 것은 달군 냄비처럼 금방 식어버리는 것이어서 오래 가지를 못했다. 나는 그저 담담한 눈길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들을 좀 관찰하다가 음식과 맥주가 나오자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대금을 치루고 나오자 해는 완전히 져있었다. 점원은 내게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또 오시라>고 인사했다. 나는 고개만 끄떡이고 나왔다. 늙은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뜩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들의 입은 꼴을 보아하니 상당히 가난한 이들인 것 같았다. 그들의 눈빛이 파리한 것은 가난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가족 중의 누군가를 최근에 잃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맥주 때문에 조금 취기가 올라있었고 밤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가을은 서늘해서 좋았다. 여름엔 너무 더워서 도무지 일을 할 때나 휴식을 취할 때나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름의 햇빛은 너무나 공격적인 것이다. 가을이 되면 태양은 어느 정도 기가 죽는다. 그 정도가 딱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 삼 분 정도 집을 향해 걷다가 문뜩 손이 허전하다는 느낌에 생각을 되짚어보니 식당에 서류가방을 놓고 온 것이 떠올랐다. 나는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혹시나 누가 가져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게 점원이 발견해서 보관해뒀을 거라는 생각에 다소 안심했다. 그런데 서둘러 가게 앞에 도착해보니 구석 자리에 있던 늙은이 둘이 가게 앞에서 큰 목소리로 서로에게 뭐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년이 잘못한 것이다>라느니 <별 수 없는 일 아니냐>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점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 선생님! 가방을 두고 가셨더군요.”
“예, 있습니까?”
“그럼요, 제가 안쪽에다 놔뒀지요.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그러면서 점원은 계산대 뒤로 들어가서 가방을 꺼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별 것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이죠?” 내가 출입구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요, 저 손님들 약주 어지간히 하시더니 결국 다투는 모양입니다. 마실 때에는 대화도 안 나누더니 말예요.”
나는 가게 안쪽에서 그 늙은이들을 좀 쳐다보다가 이만 가보겠다고 점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가방을 맡아줘서 고마웠노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이제 집에 가려는데, 한창 다투고 있던 늙은이 중의 하나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인 즉슨 상대 쪽 늙은이의 며느리가 무슨 잘못인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두 분이 서로 다투고 있던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술을 마셔서 목소리가 높아졌을 뿐 다투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말하고 내게 무언가 바라는 점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해도 진도가 안 나가니 젊은 사람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돌연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술을 한 잔 걸친 상태라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 쪽의 늙은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몹시 취해서 혀가 꼬인 발음으로 설명을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그 늙은이의 손녀가 굉장히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작심해서는 자신에게 손녀의 입원 처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그럴만한 이유가 혹시 있는가 하는 점을 늙은이에게 물어보았는데, 늙은이의 말로는 아들네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만나는 것이 손녀의 병에 나쁘고, 또 아들이 어렸을 적에 자신이 그를 키우면서 죄를 많이 지어 분명 아들과 며느리가 앙갚음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늙은이는 키가 작고 머리가 전부 하얗게 새었는데도 눈빛이 도발적이고 기운이 사나워보였으므로 아들이라는 작자가 어려서 고생을 좀 했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나는 늙은이에게 그것은 굉장히 가족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타인이 무어라고 토를 달기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늙은이는 어쩐지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양반, 난 아직도 아들을 사랑한다오.”
내가 왜 그 때 죽은 어머니를 떠올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들에게 기운을 내라고 악수를 청한 뒤에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집도 그리 클 이유가 없었다. 내 집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하나 뿐인 작은 다세대 주택의 한 층이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은 뒤에 거실에 있는 탁자에 가서 의자 위에 앉았다. 조금 몽롱했다. 아까 만난 그 늙은이의 아들이라는 사람에 대한 상상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나도 부모와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나쁘냐고 묻는다면 나쁘달 것까지는 없지만, 그다지 친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늙은이는 죄라고 말했다. 하기야 부모는 모두가 죄인이다. 부족한 인간이 새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피가 젊다면 복수심 같은 것은 남는 법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그들은 아무튼 간에 내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고, 나는 그럭저럭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했다. 살아생전에 그녀는 늘 불만에 차있었고 외로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있을 때면 늘 책을 읽고 있곤 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이불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다. 나는 조금 피곤해서 탁자 위에 엎드렸다. 거실 불은 켜놓지 않았으므로 침실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빛과 베란다에서 비쳐 들어오는 가로등의 희미한 빛이 거실을 은은히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무어 그리 나쁜 일도 없었다.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거리 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눈을 감았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탁자 위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꿈을 하나 꾸었다.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광경이었다. 침대에 어머니가 누워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옆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동생도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 옆 어딘가에 서있었다. 아, 그래, 어머니는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고통으로 주름지고 노쇠한 얼굴이 당장이라도 기운을 잃고 불이 꺼질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를 악 물고 있었고, 끊임없이 천장을 노려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녀는 마지막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새벽이었다. 베란다 창문에 파란 빛살이 비치고 있었다. 불쌍한 아버지. 돌연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기나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서 그런지 관절들이 뻐근했다. 우선 세수를 해야겠다 싶었다. 나는 거실의 불을 켜고 더듬거리며 화장실로 찾아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치자 정신이 들었다. 나는 물을 닦고 나오면서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였다. <회사 가기엔 이른 시간이군.> 그러나 곧 나는 내가 휴가를 냈다는 것을 떠올렸다. 흠, 어쩐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나는 거실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걸치고 집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하늘 저편에서 이따금 우르릉하는 낮고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에는 물기가 서려있었다. 비가 올지도 몰랐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면 바지 자락이 젖기 때문에 불쾌했다. 거리는 이미 눅눅했다. 길을 걷다보니 가끔 행인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공장 노동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모자를 뒤집어쓰고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왜 내가 갑자기 산책을 하러 나온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발은 계속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말없이 모여 있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 큰 길로 나섰고, 개시하고 있는 가게들을 몇몇 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물로 된 가면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다. 바다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바닷가는 쾌청하고 아직 빛살이 환할 것이었다. 가끔 나는 내가 이 내륙지방을 벗어나 해안가에 가서 사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생활을 바꾸면서까지 그렇게 할 의욕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살만한 것이다. 바다에 가고 싶다는 욕망은 가끔씩 머리를 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생활도 좋았다. 굳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로 가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무 의미도 없다.
여동생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림 공부를 위해 유럽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동생은 이미 죽었다. 아마 그녀가 유럽에 갔더라도 언젠가는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다 그저 그런 일이다.
하늘에는 구름이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행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십자로에 서서 이유도 없이 당황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주춤거리면서 여기저기로 고개를 향하다가, 결국 발을 돌려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아침이라 쌀쌀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집까지 돌아와보니 건물 계단 밑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올 때는 보지 못했는데, 부랑자인 것 같았다. 그는 후줄근한 옷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계단 밑에 앉아있었다.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문득 이제부터 다가올 겨울이 너무 혹독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늘 측은지심을 느끼고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호감도 가진다. 그것이 누구든 간에 말이다. 사실 내게는, 제 3세계의 악독한 독재자도 누구나와 똑같이 불쌍한 인간으로 보인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악행에 둔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누구든 간에, 결국엔 죽는다. 모두 똑같이 말이다.
내가 건물 앞에 서서 그 부랑자를 보고 있자 그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보일 듯 말 듯하게 그에게 고개를 끄떡인 뒤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공기 중에 수분이 짙었다.
나는 외투를 벗고 제대로 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흰색 와이셔츠와 정장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맨 뒤에 웃옷을 걸쳤다. 어떤 넥타이를 하는 것이 좋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검은 것으로 맸다. 그리고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지갑과 담뱃갑을 찾았다. 본가까지는 열차로 세 시간 정도 걸렸다. 거기서 얼마나 머물다 와야 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특별히 옷가지를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아, 벌써부터 아버지의 노쇠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색이 빠져서 회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과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언제고 간에 그도 죽을 것이다.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그는 혼자다. 어머니가 죽고, 함께 살던 딸마저 죽었으니, 그는 혼자다. 나는 보다시피 회사일 때문에 멀리서 살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와 함께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같이 산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버지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더 늙고 나면 양로원에 보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다.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집을 나섰다.
계단 밑에는 여전히 그 부랑자가 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든 지갑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르신,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않는 것이다. 나는 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는 입은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지폐와 나를 번갈아 보며 주저하더니, 결국 미세하게 떨리는 앙상한 손으로 지폐를 받았다. 나는 그의 지저분한 어깨를 한번 손으로 짚고서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등을 돌리는 순간 그 부랑자가 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나는 웃었다.
택시를 타고 열차역으로 가는 동안 나는 운전기사에게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좋을 대로 하시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한 대 물며 그에게도 담배를 권했더니 그는 고맙다며 자신도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무는 것이었다. 나는 성냥을 꺼내어 먼저 운전기사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 뒤에 내 것에도 불을 붙였다. 우리는 차창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고 하늘이 무거워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도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한산했다. 우리는 텅 빈 거리를 달렸고 새까만 포도는 어쩐지 하늘이 비쳐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열차역에 도착하자 나는 운전기사에게 값을 치르고 내렸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싸늘하고 묵직한 바람이었다. 주변은 온통 회색이었고 가끔 늑대의 안광 같은 빛더미들이 번쩍거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매표소로 갔다.
매표소에는 여자 직원 한 명이 창구 안쪽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앞으로 가서 창구 위에 붙은 열차 시간표 따위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보니 본가로 가는 열차가 사십 분 뒤에 있었다. 나는 아까 택시에서 담배를 피울 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여직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플랫폼 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기는 했지만 모든 게 다 안개처럼 흐릿했다. 아마도 하늘과 수증기의 탓이리라고 생각했다. 매표소 직원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재촉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어지러운 눈동자로 그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바다로 가는 티켓을 달라고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안가 마을 역에 있었다. 바다가 근처라서 그런지 바람이 더욱 차가웠다. 하늘은 맑았다. 내가 출발한 마을과는 딴판이었다. 시간은 오후였고, 내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여긴 어딘가? 아버지가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다. 왜 내가 도착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나는 생판 처음 보는 동네에 와버렸다. 바다. 소금 냄새가 났다. 내게는 짐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지갑과 담뱃갑, 그리고 성냥뿐이었다. 나는 내 꼴을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양복에 새까만 넥타이 차림. 장례식에 가야하는데, 바다로 왔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늙은 얼굴에서 그 깊고 끔찍스러운 불행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왜 죽음은 자꾸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가? 왜 그 도시에서는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는가. 아버지는 후회하고 있을까? 모르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어려서부터, 나는 가끔 나 자신을 사생아라고 생각하곤 했다. 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영적인? 내가 그러한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무언가를 믿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그랬다.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가면서도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터벅터벅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낡은 마을이었다. 혹은 늙은 마을이었다. 나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변에는 주택들과, 간혹 목조 건물도 보였다. 멀리에는 바다가 나른한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작게 보이는 배들과 까만 바위들이 보였다. 나는 한동안 길 잃은 사람처럼 마을을 돌아다녔다. 어딜 가나 소금 냄새가 배어있었고 사람들은 햇빛을 받아 갈색 빛이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 소금기가 섞여있었고,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생각해내려고 했다. 어렸을 때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 어머니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평소보다 젊어보였다. 그것이 슬펐던 것 같다. 나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는데, 수영을 잘 하지는 못해서 자꾸만 숨이 차고 입과 콧구멍 속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여동생은 모래사장에 있었고, 아버지는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물에 빠질 것 같을 때에도 아버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왠지는 몰랐다. 다만 그랬다. 가족들 모두가 모여 여행을 간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즐거운 추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원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발걸음만 빨리 했다.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거리에 그림자가 지고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문뜩 내가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자리를 구해야했다. 나는 거리 곳곳을 쏘다니면서 숙박업소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바닷가 가까이까지 내려가서야 작은 여관을 발견했다. 나는 여관에 들어가기 전에 바다 쪽으로 눈을 향했다. 수평선 저 끝은 이미 시꺼먼 먹물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돌연 소름이 끼쳤다. 바다는 조용하고 파도도 낮았지만, 저녁 해안의 스산한 공기가 내게 뱀에게 몰린 쥐 같은 심상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어떤 매혹마저 느끼면서 수평선을 한동안 빠질 듯이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검붉은 구름들이 흘렀고, 나는 결국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겉보기에 그녀는 침울한 눈을 갖고 있었고 말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방을 하나 달라고 하자 그녀는 얼마나 묵다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짧으면 하룻밤만 묵고 갈 수도 있다고, 그러나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시다면 우선 하루치 숙박비만 지불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숙박계를 적어야한다고 하며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이름과 나이, 직업 따위를 적다가 숙박하는 이유에 대해 적어야 될 부분에서 멈칫했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연필을 쥐고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고작 숙박계 따위를 너무 진지하게 적으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냥 <여행>이라고 적고 숙박계를 여자에게 돌려줬다. 그녀는 숙박비는 선불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하고 나서 열쇠를 받았다. 이 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짐은 따로 없으신가요?” 여자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한 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문을 찾아 열고 들어가자 좁고 허름한 방이 나왔다. 침대와 탁자 하나, 그리고 개수대가 전부였다. 창문도 하나 나있었다. 나는 혹시 창문으로 바다가 보일까 싶어 다가갔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맞은편 건물의 벽뿐이었다. 창문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나는 불을 켰다. 낡은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켜졌다. 방 전체가 허름했지만 침대 시트와 이불만은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잠 잘 곳이 깨끗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나는 달리 짐도 없었기 때문에 옮길 물건도 없었고, 무언가를 펼쳐놓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방안을 가만히 살피다가 침대로 가서 앉았다.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로 왔단 말인가? 지갑에는 돈도 얼마 없었다. 이 마을에 은행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아버지는 결국 혼자서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실 것이다. 나는 참으로 불효자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내게 어떤 감정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너무 비합리적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 그래, 저녁식사를 하자. 나는 한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생각했다. 방을 나와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왔다. 홀에는―홀hall이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 여자가 테이블 뒤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 주변에 어디 식사할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여행객들을 상대로 해산물을 파는 가게는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곳들은 가격이 꽤 된다고 덧붙였다. 그 직후에 그녀는 음식 값에 대한 말을 덧붙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 같은 분은 그런 금전적인 걱정이야 없으시겠죠!” 그녀는 약간 불안해하면서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여행객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는 곳이 아니라 수수하고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그런 식당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여관을 나왔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달이 보였다.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굉장히 깨끗하게 보였다. 나는 여자가 알려준 대로 해안에서 벗어나는 쪽 길로 발걸음을 향했다. 마을 안쪽으로 갈수록 빛이 없어졌다. 주택가의 노란 불빛만이 지상 위에 정적처럼 감돌뿐이었다. 나는 좀처럼 식당을 찾지 못했다. 조명이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가게는 꽤 있었지만, 그런 곳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애당초 음식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거식증에 걸린 환자마냥 식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감각들에 비해 미각에 관심이 덜할 뿐이다. 그리고 원체 소식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보니 식사를 하러 나온 것부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이미 여관에서 꽤 멀리까지 나온지라 돌아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십 분 정도 거리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마을 구석에서 작은 식당을 발견했고, 거기서 생선과 쌀로 식사하며 술을 한 병 마셨다. 독한 술이었다. 병을 다 비울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새 전부 마신 뒤였고, 나는 여관까지 돌아가는 길에 한두 번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방까지 올라와 문을 열고 들어가, 외투를 벗어놓고 침대에서 잠들었다.
자는 동안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한 밤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술 때문에 약간 머리가 아픈 것을 느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대낮이었지만 맞은편의 건물 때문에 창문으로는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불을 킬 것까지는 없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채로 개수대에서 세수를 했다. 그리고 외투에서 담뱃갑과 성냥을 꺼내,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문뜩 퇴폐적인 기분이 몰려왔다. 여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나는 외투를 방에 놓은 채로 지갑과 담배만 들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태양이 어제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계절은 가을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햇빛이 데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춥다고 느꼈다. 어제보다는 거리에 해안가에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피부가 온통 그을린 어부들도 몇몇 보았고, 거리에 앉아있는 늙은이들도 보았다. 바다 쪽을 내려다보았는데, 계절이 계절인지라 아무도 헤엄을 치고 있지 않았다. 바위투성이 해안이었다. 나는 아침식사는 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별로 식욕이 없었다. 나는 아침식사 대신 담배를 한 대 태우며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배들이 해안 저편에 떠있었다. 해안가의 바위 위에는 나밖에 사람이 없었다. 선창가로나 가야 사람이 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이었고, 깊어 보였으며, 차가울 것 같았다. 태양빛이 파도 위에서 금속성의 빛살로 번쩍거렸다. 나는 무언가 생각하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어머니에 대해서.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다. 아, 불쌍한 사람 같으니.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다른 감상은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 누군가가 내 등 뒤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관 주인이었다. “이런,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내가 물었다. 나는 셔츠 바람으로 해안 바위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내 꼴이 조금 이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 가는 차림으로 보였다. 나는 문득 가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왜 이런 데에 계세요?” 여자가 말했다.
“바다 구경을 하고 있었죠.”
여자는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나는 갑자기 어떤 충동을 느꼈다. 그 침울한 눈을 가진 여자에게, 무언가를 고백하고 싶다는 충동을 말이다. 이것은 불합리하고 뜬금없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무언가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여자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카디건의 옷자락이나, 나를 쳐다보는 갈색 눈 따위가, 전부 내 영혼을 치명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피가 머리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 나는 갑자기 내뱉었다. “실은 어제 내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것이 우스워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마 뒤에야 여자는 말했다. “네?” 나는 그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사람들은 죽음을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꿔보면 모든 게 더 간단해집니다. 그들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만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사는 친척을 몇 년 동안 만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슬픈 겁니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모든 것이 더 간단해집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데,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생각들을 했습니다. 여동생이 죽은 것에 관련해서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나는 갑자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여자는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아니,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얼이 빠져있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나는 어딘가 목적하는 방향이 실종된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바다에 왔다. 아마도 그렇다.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바다에 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태양은 내리쬐고 바람은 차갑다. 소금 냄새가 난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바다에 왔던 것이 기억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들이다. 나는 그냥 내가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나는 수영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느릿느릿 바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두가 바닷물에 젖고, 곧 허리까지 잠겼다. 여자는 놀란 눈으로 바위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매사가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헤엄을 쳐야했다. 어디론가 가는 것이 좋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로 점점 걸어 들어가고, 마침내 어깨까지 잠기자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서툰 솜씨로 수평선을 향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파도에 거품이 일고 바닷물이 입으로 마구 들어왔다. 차가웠다. 가을의 바닷물은 차가웠다. 가끔 훨씬 더 차가운 조류가 몸을 훑고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뼈까지 시린 느낌이 들었다. 저쪽 뒤편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수영을 계속 했다. 나는 계속 헤엄쳤다. 수평선 너머로, 수평선 너머로. 저 너머까지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무언가가 있겠지. 뭔지는 몰라도, 여하간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