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9 -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요?"
사람과의 소통에 있어서 웃음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는 어느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 내 수첩과 펜은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더욱 단단하고 끈질긴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 그것들은 어느새 실체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그 실체에서
도려내온 현상과 관념에 대한 추상적인 저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밥을 먹지 못하게 만들고, 잠들지 못하게 만들고, 혀를 묶어버리며, 어느
누구와도 손을 잡지 못하는 가시 돋힌 인간이 되게 하고, 마침내는 그를 대낮의 도로 한복판에서 자살하게 만드는 정신의 결벽증을 알고 있는가.
혹은 앓고 있는가.
꿈에서 만나는 까뮈는 어쩌면 나에게 '넌 소설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는 일이고, '말'이란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중대함을 잃었다. 우리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 하늘을 기억하고 있는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는 빨리도 그 가혹한 추위와 서슬퍼런 칼날로 위협당하던 정신의 긴장을 잊어버렸다. 불 붙은 땅의 냉기와 고요한 무관심과 치열하며
파멸적인 감성도 잊어버렸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아마도 우리는 딱 살아있는 만큼 잊어버릴 것이다. 문자야말로 감성을 끈질기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러나 영원히 한가지 이미지에 붙들린 병자일수는 없다. 섬광과 태양에 미쳐있던 시절은 역설적이게도 그 섬광과 태양을 내게서
떨어트려놓는 객관화의 장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분석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분석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어느새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의 나이를 먹지 않는다. 아무런 개입도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들끼리
대화를 하고, 그 반복 사이에서 우리의 정신은 하얀 형광등처럼 단색적이고 명징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경멸은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가장 중요한
절망이다. 우리들중 누군가는 그것을 피해망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부에서부터 날 선 칼날처럼 찔러들어오는 추잡한 경멸을 감각은 틀림없이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우연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우연과 우연이 뒤섞여 그 사이에서 비겁하고도 잔혹한 경멸이 태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근저의, 그 탄생의 근저에서 내가 보고 좌절하는 그들의 새까만 자의식이 그저 내 망상증의 조각일뿐이란 것인가. 마침내 사고회로가 뿌연
연기를 피워올리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몇 십 번씩 형광등을 윤이 나도록 닦아도 별 수 없는 일이다. 문맥도 없이, 사실 그런 것을 따질
이유가 없다. 내 분열된 관념들을 억지로 이어붙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새 잠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우리들은 그 결벽증 대신 깨진
거울조각 같은 인지를 얻었다. 나는 망가진 이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혐오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는 말이든, 항상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완전함 앞에서 헤매다가 태양의 사막 한가운데로 굴러떨어졌다. 감상이 없는 추상성과 의도가 없는 비유들 사이로. 나는 모든 모노톤의
흑백사진이 불태워지는 사막으로 굴러떨어졌다. 이곳에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환장하는 희멀건 안개 따윈 손톱만큼도 없다. 여기는 이미 모든 것이
타고 난 뒤다. 태양 아래에는 모래와 소금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한참 전부터 마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
권총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같은 시대다. 이미 하늘과 인간들의 온갖 구멍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에 가려 보이지도 않게 된 태양이지만, 곧 터져버릴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도시의 마천루와 사람들 사이에 떠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고 폭력적으로 불타다가 마침내는 터져버릴
것이다. 그야말로 병자들을 위해서.
(파괴적이지 않은 관능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