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1
이건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다.
하루 종일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변경해야할 단어나 문장구조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간다.
카페인을 몹시 조심하고 있다. 카페인 60mg이라도 섭취했다가는 카페인이 아니라 암페타민을 먹은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과거에 하루 드립커피를 대여섯잔 씩 마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사코딜이 도움이 된다. 하루 왠종일 정신이 과운동하고 있지만, 형형색색의 칵테일인 아침약과 취침약을 제외하면 내가 하루에 임의로 복용할 수 있는 신경안정제는 자낙스 두 알 뿐이다. 가장 긴급할 때만 써야한다. 안 그랬다가 고통을 겪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쩐지 비사코딜 10mg이 도움이 된다. 전혀 기작을 짐작할 수 없지만, 그다지 먹는 것도 없는데 장 속을 텅 비우면 신경이 좀 안정된다.
저녁 6시 쯤에는 꼭 자낙스 한 알을 복용한다. 그때쯤 아버지가 퇴근하시는데, 보통 오후 6시까지 난 3~4시간을 쉬지도 않고 글을 쓰느라 뇌에 불이 붙은 상태다. 아버지에게 내 분노문제와 히스테리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인간이 생화학적 기계에 불과하다는 내 믿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알프라졸람 제제는 순식간에 날 친절한 가족구성원으로 만들어놓는다. 이후 두 시간 정도 진정한 채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영상 따위를 즐길 수 있다는 건 덤이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집필과 조사, 집필과 조사, 집필과 조사, 그리고 집필과 조사뿐이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온갖 현실적인 문제들을 뇌가 무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지금 내 뇌는 스스로를 혹사시키면서, 동시에 '이번 작품만 완성한다면' 운운하는 희망만을 이상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고, 분노에 떠밀려가면서도 행복하고, 히스테리컬한 신경증 환자가 되면서도 행복하다.
이건 그야말로 저주에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저주는 아니겠지. 왜냐하면 내가 의학사전에서 '조증 삽화'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