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이 그 인생이라는 걸 돼지 앞다리에 걸었는지 뒷다리에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축하합니다. 요식업 종사자가 그런 문구를 자기 가게에 걸어놓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체질적으로랄까, 선험적으로랄까 그런 발언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런 열정적인 느낌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인생, 인생을 걸다. 아마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다는 뜻이겠네요.
족발이 됐든 백신 연구가 됐든, 자신의 인생을 무언가에 거는 사람들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더없이 무섭습니다. 어떤 대상에 열성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저에게 있어 사람들이 말하는 천사의 아름다움 같은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천사를 만나본 일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그럴 것입니다만, 모두가 천사는 아름답다고 말하니 분명 천사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정확히는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그러한 본적도 소유해본적도 없지만 반드시 아름답다고 정해져있는 것에 대하여, 반복합니다만, 그것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더없이 무섭습니다. 경외라고 할까요. 비유를 위해 하느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가정합시다. 구약신경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립시다. 지금 하려는 얘기에 구약신경은 정말이지 도움도 되지 않고, 차라리 방해입니다. 아무튼 그런 완벽하고 아름답고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이며 상냥하면서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뜬금없이 길거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을까요. 단언컨대 불가능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지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존경이 북받치는데, 그의 완벽함과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초라한 존재가 마치 하수구에 사는 해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중요한 정보도 되지 않습니다. 그의 신령한 옷깃에 인간의 때가 묻을까봐 손을 내밀 수도 없고, 온갖 지저분한 용도로 사용했던 입을 이용해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불쾌한 육신의 부품 중 하나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일조차 신성모독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은 무지막지한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그가 무서운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의 완전함이 어쩔 도리도 없이 무섭습니다. 저 같으면 차라리 도망칠 것입니다. 골목거리의 가장 지저분하고 불온한 곳까지 도망칠 것입니다.
갑자기 웬 천사니 하느님 얘기냐고 의아해하실 수 있는데, 애당초 이건 <무언가에 인생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을 삶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제가 느끼는 심정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였습니다. 사실 전 신학도도 개신교도도 아니라서 비유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하여간에 의미는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균형도 못 잡고 병적인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은커녕 동기도 없고, 저질러왔던 인생은 패악질과 수치, 남은 것은 계속 도주하는 습성뿐입니다. 17살인가 18살 때의 일인데요, 친구가 체스를 두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드를 펼치고 규칙에 따라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백이라서 먼저 두어야 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킹을 눕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네가 이겼어.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농담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노력이니 시도니 다툼이니 경쟁이니, 승리하고 패하고…… 아아.
족발에 인생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을 축하하며 질투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이 하염없이 무서우니, 당신과 말을 섞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