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생각

제 3자

Lim_ 2020. 2. 29. 01:04

3

 

 

죽어도 괜찮아.

어차피 576천만년 뒤에 미륵부처님이 다 성불시켜주실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숙취 때문에 몸부림을 치며, 윤회는 싫어, 라고 헛소리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방바닥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그는 울고 있었다. 울고 몸부림치면서 숙취를 가라앉히려고 찬장에 있는 신경안정제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고통의 정체는 알고 보면 정말 하잘 것 없는 거야.

 

존재의 뿌리까지 한방에 지워버리는 약은 없나요?

 

그의 동생이 물을 떠다주었다. 한줌이나 되는 약을 삼키고도 20분 정도 그는 호흡곤란 때문에 괴로워했다. 도중에 약 봉투에 들어있는 부작용 억제제가 오각형인 것이 우습다고 웃었다. 시야를 흐리게 하고 보면 별사탕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러면서 웃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물을 떠준 동생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잘 안 된다.

20분이 지나자 그는 점점 동작이 굼떠지기 시작했다. 호흡이 느려지고 눈은 반만 뜨고 있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어쩐지 그의 왼쪽 다리가 가끔씩 경련했다. 퍼뜩 기억이 난 듯 기어가다시피 하며 침대로 올라가서 쓰러졌다. 이불도 안 덮고 쓰러진 그에게 동생이 이불을 덮어주었다.

 

지옥 아니면 천당이라니, 간단하네요.

가톨릭에는 연옥도 있다던데.

거기는 살기가 좀 어떻답니까.

 

애당초 그가 하는 말은 뭐 하나 믿음직한 것이 없다. 10년 전과 2년 전도 구분 못하는 인간이다. 전에도 스스로 말하기를, 망상과 경험이 구분이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 과거의 망상이 현재의 경험과 뒤섞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 내뱉는 말마디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비존재가 되고 싶다, 비존재가 되고 싶다, 지겹게 되뇌던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 뭔가를 시도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항상, 가슴에 자포자기라는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흘렀다.

 

어디서 들었는지, 계속 <I don’t wanna be alone, in the darkness.> 하며, 무슨 팝음악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다닌다.

어둠뿐만이 아니라 대낮에도 혼자라는 것은 까먹었는지.

 

죽어도 괜찮아.

어차피 576천만년 뒤에 미륵부처님이 다 성불시켜주실 거야.

카페인 때문에 동공이 열린 눈으로, 거울 안에서 그가 중얼거린다. 거울 안의 그는 괜찮을 리가 없다. 윤회가 무섭다는 것을 죽지 않는 핑계로 쓰고 있는 그가 괜찮을 리가 없다.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야밤에 끝나지 않는 방청소를 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