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

H. 노바크와 모든 문명에게 바침

Lim_ 2016. 4. 26. 04:05

H. 노바크와 모든 문명에게 바침



1.

나는 말레이 여자 마라를 상상한다.

적도에 세워져 무너진 도시를 상상한다.

해안에 따개비 무리처럼 낮고 빼곡하게

흙으로 지어진 마을들은 아주 조용히 먼지가 되었다.

무너지는 것은 높은 것들이다.


창촉 같은 태양빛이 무작위하게 내려쬐어

높은 건물들은 갈라지고 추락했다.


말레이 여자 마라는

무너져 인동덩굴과 온갖 이끼류로 뒤덮인

거대한 건물들의 폐허 밑에서

표범 토오와 함께 잠들어있다.


2.

문득 나는 일본에서 보았던

아주 촘촘하게 숲을 이룬 침엽수림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 나는 데이비드 소로우가 감자를 심던

작은 텃밭과 오두막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최저한의 문명도

내게는 아직 달갑지 않다.


3.

나는 너를 상상한다.

청계천 주변 무너진 은행가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직접 만든 올가미 그물로 잡고

땅 밑에 파묻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본점에서 끄집어낸

책들로 불을 피워 노루고기를 익히는 너를.


광화문에 있는 녹슨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햇빛을 잘 받으라고 내장이 제거된 생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여름이 끝나기 직전 멧돼지 가죽을 입은 여자들이

충무공을 타고 올라 말린 생선을 모아올 것이다.


어느 순간 적도의 숲에서는 불이 난다.

내가 사랑했던 시에서 말한 것처럼

불길은 광기처럼 타오른다.

나무들이 죄 재가 되고 나면 그것은 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무와 풀들을 키울 것이다.

너는 마라와 함께 그것을 본다.


너는 대나무로 깎은 창을 쥐고

갈색으로 변한 의정부 시내의 이성계 동상 옆에서

앉은 채로 낮잠을 잔다.

가끔 야생마들이 갈라진 국도 위를 뛰어가고

성형외과와 아로마테라피 샾의 광고간판으로 번쩍이던

드높은 빌딩들은 허리가 꺾여 영장류들의 집이 되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너는 가을 전에 준비를 한다.

말린 고기들을 돌로 만든 바늘로 꿰어

허리에 감고

고라니 가죽을 덧댄 웃옷으로 바닷바람에 대비한다.

이젠 아무도 없는 주한미군 캠프에서

어렵사리 잭나이프 하나를 찾아내

칼날을 무두질한 돼지가죽으로 감싸고 서쪽으로 걷는다.


네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밤하늘의 별이다.

너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을 알고 있다.


네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가 아마도 인천일 거야.」

해안가의 도시들은 이미 쓸려나가

곱고 빛나는 모래가 되어 네 발밑에서 굴러다닌다.

작은 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구멍이 송송 난 해변에서

수평선을 보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가라앉은 유조선이

새까만 석유에 둘러싸여 선체 앞부분만을 수면 위로 내놓고 있다.


여긴 아직도 가솔린 냄새가 나고

깃털에 석유가 들러붙은 채 말라죽은 새들의 시체가

해변 곳곳에 널려있는 것을 너는 본다.

너는 매년 한 번씩 이곳에 온다. 그것은 너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너는 매년 한 번씩 여의도로 가

풀썩 주저앉은, 한때는 황금색이었지만

지금은 암녹색과 녹슨 철근의 색으로 변한 마천루를 본다.


넌 갈대줄기로 화살을 만들고

어린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강북구에서 창을 던져 사향노루를 잡고

간석기로 늑대 가죽을 무두질해 옷을 해 입는다.

너에게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도 있었지만

그걸 입으면 토오가 앞발을 휘두르며 위협하기에

흙속에 묻으라는 마라의 조언을 따랐다.


밤이면 너는 서점에서 발굴한 책들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고

나이프를 쥔 채 그 옆에서 잠든다.

사위는 새까맣고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고

올빼미와 소쩍새 우는 소리가 난다.


그런 너를

나는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