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비참
삶과 비참
세상은 잠들어있고 나는 내 살들을 물어뜯고 있다.
―그런데 누가 세상을 세상이라고 불렀는가?
잠든 이들이 가득한 영안실이나
서랍 속에 죽어있는 개미떼들이나
<세상>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죽음이 필요하다.
비참. 구토하고 싶어도 구토할 수 없는
나는 카페인을 왼쪽 팔에
모르핀을 오른쪽 팔에 주사하면서
입으로는 흰색의 중추신경억제제를
한줌씩 삼키고 있다. 비참함을 위하여.
내일도 내 눈에 어둠은 없을 것을
새벽이 가면 나는 비명 지르고 아파할 것이다.
도대체 왜 태양이 떠야하는지 소리치며 저주할 것이다.
모든 무게들이 타들어가고
남은 재로 만든 새벽 두 시의 밤공기는 참으로 좋았지!
그대로 나는 별나라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었겠다.
화학과 신경약리학이 만들어낸 몸뚱이는
검은 나무 밑에 눕혀두고.
거울을 보면 눈이 붉은 포식성의
늙은 야수가 보인다. 담배를 문, 포기의 낯을 한.
심지어 내 영혼은 아직까지도 하늘만을 보고 있다.
<살아가고 싶지 않다>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가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아닌지
오로지 폐에 니코틴만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린다.
세상은 한때 아름다웠는데
자살하는 자를 비웃고 살아가는 자를 경멸하고
냉소주의는 나에게도 칼을 들이댄다.
아무도 특별할 수 없다. 아무도.
때가 되어 안구출혈이 일어나면 나는 성당으로 향해
해머로 하얀 성모상을 때려 부수고
사랑을 설파했던 어느 가엾은 남자의 손과 발에서 못을 뽑아
십자가에서 내려 껴안고 울어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버림받은 뒤부터 살아가는 것이라고
목수의 아들에게 눈물로 속삭일 것이다.
아프다. 모든 것이 정말로
더럽게 아프다.